[남성현의 사막의 구도자들] ‘설마’와 ‘그 날’(The Day)

입력 2012-08-10 18:26

2002년 내가 스트라스부르에서 박사논문을 한창 쓰고 있던 중으로 기억된다. 당시 북핵 위기가 고조됐고 프랑스에서도 이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다.

하루는 저녁 뉴스를 보는데 프랑스의 주요 방송인 TF 1 아나운서가 미국이 북한 핵시설을 곧 공격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미국이 북한 핵시설을 공격한다니 그럼 전쟁이 터진다는 말 아닌가. 화들짝 놀란 나는 그 방송에 귀를 기울였다. 전체적인 방송의 논조는 북핵에 대한 미국의 공격을 거의 기정사실로 하고 있었다.

폭탄이 곧 터진다는데…

서울에 파견된 TF 1 특파원이 연결됐다. 이 특파원은 서울의 한 재래시장에서 한 상인 아주머니와 인터뷰를 했다. 프랑스 특파원의 질문은 미국이 곧 북한 핵시설을 공격할 것으로 예상하는데 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했다. 그 아주머니는 지난 몇 십 년 동안 별일 없었는데 “설마 별일 있을까”라고 대답했다. 그 특파원은 “미국의 공격이 임박했는데도 서울은 폭풍 전야처럼 고요하기만 하다”는 멘트를 남기면서 보도를 마무리했다.

너무나 충격적인 보도여서 당시 의정부에 사시던 부모님의 모습이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조바심에 그냥 있을 수 없어 당장 의정부로 전화를 걸었다. 아버지에게 프랑스 방송이 미국의 북핵 시설 폭격이 임박한 것으로 보도했으니 충주 큰아버지댁에 당분간 가 계시는 것이 어떠냐고 말씀드렸다.

그러나 이역만리 프랑스에서 전달된 아들의 첩보(?)에 아버지는 코웃음을 치면서 “설마 전쟁이 나겠느냐. 얘야 말도 안 되는 소리 아서라”고 하시는 것이 아닌가. 북핵 위기를 바라보는 프랑스 쪽의 심각한 시각에 대해서 재차 말씀드렸더니 아버지는 다시 한 번 호탕하게 웃으시면서 “가긴 어딜 가냐. 전쟁 나면 나만 죽냐 다 같이 죽지. 다 같이 죽으니 괜찮다”고 농담을 하시는 것이었다. 끝내 미국은 북핵 시설을 폭격하지 않았고 나의 첩보는 다행히 오보로 끝이 났다.

DNA처럼 녹아 있는 ‘설마’

우리말의 ‘설마’는 프랑스어로 옮길 수가 없다. ‘설마’의 뉘앙스를 전달하는 영어단어도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라는 속담이 있기까지 하지만 우리의 유전형질 속에는 ‘설마…설마…’ 하는 태도가 DNA처럼 녹아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성경은 ‘설마’ 대신 ‘그 날(The Day)’을 말한다. 성경은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빛을 내지 않는 우주적 파국으로서의 ‘그 날’(The Day·막 13.24)이 올 것이라고 한다. 과학의 발전에 의해 우주적 종말이 단순히 유대묵시문학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발생할 수 있는 일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루이드 앨버래즈(Luid Alvarez)라는 과학자는 6500만년 전 멕시코 유카탄 반도에 지름 10㎞짜리 운석이 떨어져 180㎞의 거대한 운석구가 생겼고 이로 인해 공룡이 멸종됐음을 주장한 바 있다. 그의 가설은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다.

오늘날 미국 나사(NASA)의 과학자들은 운석이 지구를 향해 돌진하는 것을 가상해 미사일로 격추하는 것을 연구한다고 하지 않다던가. 서양 사람들은 성경의 영향에 의해 종말의 ‘그 날’을 다양한 방식으로 늘 상기시켜 왔다. ‘영원한 도시(civitas aeterna)’ 로마가 고트족에 의해 함락되던 410년 8월 24일은 아직도 서유럽 사람들에게 ‘온 세계가 하나의 도시 속에서 멸망당하던’ 바로 ‘그 날’로 기억되고 있다.

오늘날 세계의 유수한 과학자들은 결국 핵전쟁으로 인해 인류의 문명이 존폐의 기로에 서는 ‘그 날’이 올 것임을 예언하고 있다. 최근에는 경제적인 위기에서 비롯되는 ‘그 날’에 대해서 말이 부쩍 많아지고 있다. 자본주의의 산실인 서방세계는 이미 여러 차례 대공황을 겪은 경험으로 경제적 파국으로서의 ‘그 날’이 다가올 것임을 알고 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많은 사람들이 ‘그 날’이 멀지 않았음을 경고하고 있지 않은가. 만약 신용시스템이 붕괴되는 그 날이 온다면 그 사건은 단순히 경제적 파국에서 그치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 날’을 생각하며 예비하라

서구인들의 핏속에 면면히 흐르는 ‘그 날’의 관념은 성경 시대 이후 4∼6세기 수도자들을 통해 서양문화에 각인이 된 것 같다.

사막 기독교 전통은 ‘그 날’에 대한 경고로 가득 차 있다. 원로에게 어떻게 겸손에 이르게 되는가를 물었더니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그 때’를 기억함으로 겸손에 이른다고 하였다. 안토니오스는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바로 ‘그 날’ 우리가 깨어 기도했는가 혹은 자신에 대해서 눈물을 흘렸는가를 물으신다고 하였다. 압바 테오도로스라는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그 장면을 상상해 보라고 권고했다. 에바그리오스는 이런 말을 남겼다. “늘 죽음을 생각하라. 영원한 심판을 잊지 말라. 그리하면 그대 영혼에는 동요가 없으리니.”

우리의 생각 속에서 ‘설마’를 지워버리고 ‘그 날’을 생각하며 두려움을 갖는다면 내 스스로가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고 우리 사회도 그 뿌리부터 든든한 세상으로 바뀔 수 있지 않을까.

<한영신학대 교수·캐나다 몬트리올대 초청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