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차정식] 폭력으로부터의 자유
입력 2012-08-09 18:46
잊을 만하니 또다시 우리의 심장을 후벼 파는 끔찍한 살인사건이 연이어 터졌다. 통영과 제주에서 연약한 소녀와 중년 여인을 대상으로 폭력을 행사해 성적 탐욕의 제물로 삼은 비극이 불거진 것이다.
힘에 부쳐 당한 그들이 범죄자의 저돌적 성욕에 흔쾌히 합의해줬을 리 만무하다. 그들의 성적 선택권과 자유의사는 무도한 폭력에 깔려 일순간 질식해버렸다. 중국에서 탈북자의 인권운동에 헌신하던 김영환씨는 공안당국에 붙잡혀 전기고문 등의 가혹행위를 당했다고 고백했다. 불법 어로행위를 일삼다가 체포된 자국의 어부들 신병에 대해 국제적 인권의 표준에 걸맞은 처우를 요구하던 그들이었다.
이런 어이없는 사태를 접하면 상식을 좇아 사는 이들은 솟구치는 분노로 가슴이 무너진다. 용산참사와 쌍용자동차 파업 사태의 후유증이 채 가시기도 전에 자동차부품업체 SJM과 만도의 생산 현장에 투입돼 노동자들을 향해 무차별 폭력을 행사한 단체는 지난 대선정국에서 후보자를 경호하던 용역경비업체라고 한다. 이 같은 국가 폭력의 행사는 이 땅의 군부독재체제 아래 특정 기관을 동원해 고문을 자행하던 시절의 상처를 덧나게 한다.
하나님의 온전함을 닮아야
이런 폭력이 으레 그렇듯 가해자는 시신을 훼손하거나 TV에 버젓이 등장해 알리바이를 주워섬기는 식의 행태를 보인다. 거짓말로 천연덕스럽게 폭력의 치부를 가리며 권력자의 의도를 대변하거나 돈의 미끼에 걸려 상대방의 주장에 담긴 진의 여부를 분별하지 않은 채 무조건 때려 부순다.
타인의 자유를 짓누르고 짐승의 얼굴로 돌변한 저들의 악행은 세상의 음지에 감추어진 탐욕의 폭탄이 터진 결과 아니었을까. 저들의 폭력은 외부로 터진 것이고 아직 터지지 않은 우리 내부의 잠재적 폭력은 충동적 곡예에 부글부글 끓다 시들기를 반복할 따름이다. 성서에서 폭력의 기원은 질시와 분노에 사로잡혀 아우 아벨을 때려죽인 형 가인의 살인사건으로 소급된다.
이 비극적 파동 이후 이 땅은 자신의 억울한 죽음을 호소하는 원한의 아우성으로 들끓게 되었고 범죄의 역사는 폭력의 악순환과 맞물려 지금도 여전히 되풀이되고 있다. 예수는 어린이의 순정한 심사를 기특히 여겨 천국에 적합한 자질의 모범으로 설정했다. 그러나 여전히 짐승이기를 고집하는 정글의 세상에서 어린이를 비롯한 약자의 육체는 즉흥적 탐욕의 충동에 가장 취약한 희생물로 전락하기 일쑤다.
칼로 일어나는 자는 칼로 망하리라는 예수의 어록이 증언하듯, 물리적 폭력에 의지해 타인의 인격과 자유의사를 깔아뭉개는 작태는 파멸의 지름길이다. 그것이 육체적 살인이든 언어적 폭력이나 정신적 살상이든 폭력을 제어하지 못하는 개인과 집단은 또 다른 폭력의 소용돌이를 불러오며 그 희생물을 요구한다.
일찍이 예수께서 십자가의 희생으로 원초적 폭력의 사슬을 끊어버렸건만 인간의 욕망은 다시금 예수의 모델을 가탁하여 제2, 제3의 희생제물을 갈구하고 있다. 철학자 레비나스의 통찰대로 ‘타인의 얼굴’은 우리에게 무한한 책임을 요구한다. 그 연약한 타자의 얼굴은 상대방의 자유를 짓밟는 폭력을 자행하지 말고, 타인의 생명을 존중하라고 우리 양심에 호소한다.
타인의 생명과 자유 존중하길
예수는 선악의 경계를 넘어 햇빛과 비를 주시는 하나님, 타인을 무한히 포용하시는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닮아 우리도 온전해지라고 가르쳤다. 그 온전함의 목표를 향해 통과해야 할 첫 관문은 내면의 욕망 속에 들끓는 폭력의 충동을 다스려 우리가 얼마나 그것의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가이다. 일단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나와 타인의 자유를 지켜낼 수 있기 때문이다.
차정식 한일장신대 교수 신학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