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타까운 이야기지만 우리는 주변 사람들을 잘 믿지 않는다. 주변 사람과 약속하거나 거래할 때 상대방을 믿기보다 경계하는 이들이 많은 편이다.
대통령 후보와 국회의원 후보의 공약들도 대부분 반신반의 형태로 받아들인다. 지키지 못할 약속을 남발한다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선거의 해를 맞아 주요 정당은 복지와 교육 부문에서 ‘더 주겠다’는 달콤한 약속을 쏟아내고 있다. 국내에는 새로운 법안을 제출할 때 재원 마련 방안을 함께 제시해야 한다는 규정이 없기 때문이리라. 그러다보니 정치가들이 경쟁적으로 ‘덜 걷고 더 주는’ 법안을 내놓고 있다. 지금도 국회 의원회관 일대에서는 ‘믿음을 살 수 있는’ 법안보다는 ‘선심을 살 수 있는’ 법안을 만드느라 보좌관들이 여념이 없을 터이다.
주목할 점은 지난 4월 총선 때 국민들이 복지공약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는 사실이다. 여야가 복지공약을 남발하면서 국민 다수가 실현 가능성 없는 비슷비슷한 얘기로 치부하고 외면한 것이다. 그런데 대선이 다가오면서 다시 복지가 주요 이슈의 하나가 되고 있다.
우리 국민은 지혜롭다. 그리스 재정위기가 어디에서 유래하였는지, 또 일본의 여당 민주당이 2009년 선거에서 퍼주기 복지공약을 내걸어 집권했으나 재원이 없어 공약을 제대로 지키지 못해 대국민 사과에 나서면서 지지도가 급락, 야당으로 전락할 위기에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이제 국민들은 무상○○을 약속하는 정당과 정부보다 신뢰감을 주는 정당과 정부를 지지할 것이다.
“북유럽 국가의 성공한 복지는 규모가 크지만 국민 상호간의 신뢰도가 높고 정부 등 공공부문의 투명성도 높아 낭비가 적고 지속가능하다. 반면 남유럽 국가(프랑스, 독일 포함)의 실패한 복지는 규모가 큰데 신뢰도와 투명성이 낮아 낭비가 많고 지속가능하지 않다.”
“가미일영(加美日英)은 신뢰도와 투명성이 양쪽의 중간 수준인데 복지규모가 작아 지속가능하다.” “사회구성원 간의 신뢰도와 공공부문의 투명성이 높지 않으면 소득재분배 과정이 왜곡되어 복지규모 증가가 연금, 건강, 교육, 고용, 보육 서비스수급자의 만족도 증대로 이어지지 않는다.”
2011년 연초에 나와 큰 주목을 받고 있는 앨건 등(Y Algan-P Cahuc-M Sangnier, 독일노동연구소·IZA)의 주장이다.
우리나라는 신뢰도와 투명성이 낮은 편인데 복지 규모가 워낙 작아 그동안 이들의 가설이 잘 들어맞지 않는 유형의 국가 중 하나로 분류돼 왔다. 하지만 지난 십수년 사이에 복지규모가 크게 늘어나 이들의 가설이 적용될 수 있는 사례로 바뀌고 있다.
고령화 속에서 복지재정이 지금 같은 속도로 늘어나면 자칫 남유럽 국가 유형으로 근접해 갈 수 있다. 물론 바람직한 방향은 신뢰도와 투명성 수준을 지금보다 훨씬 높여 가미일영(加美日英) 유형으로 발전해 가는 것이다.
이를 위해선 지난 50년 사이에 이들 국가가 국민의 신뢰 기반 위에 낭비를 줄이면서 소득재분배에 기여하도록 추진한 복지정책을 찾아내 이를 응용하고, 무풍지대인 국내 기득권층의 복지특권을 더 이상 용인하지 않는 ‘믿음이 가는 정치’가 요망된다. 기득권층의 양보를 이끌어내지 않으면 소득재분배 강화는 매우 힘들다. 기득권 침해 없이 무상복지 확대에 나서면 소득재분배 효과는 미미한 채 재정위기만 가중될 뿐이다.
그리스 등 남유럽 국가는 이를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복거지계(覆車之戒) 사례이다. 우리의 복지정책은 양적 확대 못지않게, 아니 그 이상으로 국민 상호간의 신뢰도와 공공부문의 투명성 증진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추진돼야 한다.
배준호 한신대 교수·글로벌협력대학
[국민논단-배준호] 양보다 신뢰가 우선인 복지
입력 2012-08-09 18: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