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품 진위 감정’ 판사가 할 수 있을까

입력 2012-08-08 22:41


1950년대 어느 날 가난한 화가가 미군 주둔 호텔을 서성였다. 배고픈 화가는 그림을 팔아 그림 도구와 식량을 사고 싶었다. 한 미국인이 붓과 물감을 화가에게 주었고 대가로 그림을 선물 받았다. 오랜 세월이 흘러 노인이 된 미국인은 지하 창고에서 그림을 꺼냈다. 이 그림이 바로 국내 경매 사상 최고 낙찰가 45억2000만원을 기록한 박수근 화백의 ‘빨래터’다.

빨래하는 가난한 여인들, 작고 여린 것에 시선을 둔 화백의 그림은 위작 논란으로 한때 미술계 태풍의 눈이 됐다. 2009년 법원이 “진품으로 추정된다”고 판결해 사건은 일단락됐다. 그러나 여전히 이 작품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미술계는 반신반의다.

미술계는 법원이 진품 여부를 판정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지적한다. “과학감정은 작품에 쓰인 물감이나 캔버스 등 재료가 작가 생존 당시에 개발된 것인지 확인하죠. 방사선 동위원소분석법으로 연대 측정을 하기도 하고요. 하지만 연대 측정은 오차 범위가 40∼50년이기 때문에 근현대 작품에선 사용되지 않습니다. 과학감정만 쓰이는 건 아니죠. 작가의 변화선상에 해당 작품이 있는가, 일맥상통한가도 봐야 하고요.” 최명윤 명지대 문화재보존관리학과 교수는 설명했다.

뉴욕타임스는 작품 값이 오르면서 법원이 미술계의 위작 논란을 해결해야 하는 경우가 증가하고 있다고 5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액션 페인팅의 대표 작가 잭슨 폴락, 추상 표현주의 대가 윌렘 드 쿠닝, 화면을 차지하는 색으로 정열 우울 신비 순수 절망 등 인간의 감정을 표현하는 색면 추상의 거장 마크 로스코. 일생을 바친 천재 화가들의 작품은 모두 한 남자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다.

폴 가데페. 이 남자의 인생에 많은 성취가 있었지만 미술사 학위만은 없다. 미국 뉴욕주 맨해튼 연방지방법원 폴 가데페 판사는 전문가들도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놓고 고민 중이다.

판사는 과연 진짜와 가짜를 알아낼 수 있을까. 이것은 미술계의 오래된 숙제다. 전문가들은 때로 법원의 결정에 의구심을 품기도 한다. “판사가 담석을 떼어낼 수 없어도 의료 과실에 대해선 판결을 내리죠.” 예술법(art law) 전문가 로널드 스펜서는 판사의 진품 여부 결정을 이렇게 비꼬았다.

예술계와 법조계가 작품을 평가하는 기준에도 차이는 있다. 증거의 무게를 각각 다르게 판단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판사는 전문가들에 비해 화가의 서명에 더 의미를 두지만 전문가들은 감정가들의 눈, 그 자체에 주로 의지하는 편이라고 뉴욕타임스는 전했다.

판사들이 진품 판정을 포기하는 경우도 있다. 1929년 위작 논란이 일었던 ‘라 벨 페로니에르’. 머리 장식을 한 아름다운 여인이란 뜻을 지닌 이 그림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작품으로 추정됐다. 당시 그림 소유자는 가짜를 팔았다며 미술품 거래상 조페스 두빈을 고소했다. 전문가 두 명은 서로 상반된 의견을 제시했고, 배심원단은 결국 평결을 내리지 못했다. 뉴욕주 대법원은 사건을 파기하고 항소심으로 돌려보냈다. 진품에 대한 판단은 예술적 영역이지 법이 대답해야 할 질문은 아니라는 게 진짜 이유였다. 이후 ‘라 벨 페로니에르’는 2010년이 될 때까지 팔리지 않았다. 경매회사 소더비가 레오나르도의 추종자가 그린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법원이 진품이라 판결한 작품이 미술 시장에 의해 뒤집히는 상황도 생긴다. 1993년 연방 법원은 키네틱 아트의 선구자 알렉산더 칼더의 모빌 작품 ‘리오 네로’가 진품이라고 판결했다. 그러나 소유주는 19년간 작품을 팔 수 없었다. 유명한 전문가 클라우스 펄스가 가짜라고 선언한 것이 화근이었다. 소유주는 칼더 재단으로부터 진본임을 증명 받기 위해 노력했지만 이 또한 거절당하고 말았다.

“미술계에선 작품이 진짜라는 법원 결정이 가치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죠. 사실 결정은 미술 시장에 달려 있어요.” 변호사 피터 스턴은 이렇게 설명했다. 임산부가 아주 약간 임신할 수 없듯 작품도 아주 조금 진짜일 수는 없다. 소비자들은 다양한 증거 속에서 진품 여부를 결정한다. 아직은 법원보다 시장의 입김이 우세하다. 적어도 미국에선.

박유리 기자 nopimul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