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세에 첫 번째 왕비와 사별한 영조, 15세 정순왕후에 ‘처녀 장가’ 간 까닭은?

입력 2012-08-07 22:27


조선 21대 임금 영조(1694∼1776·사진)는 66세에 첫 번째 왕비 정성왕후(1692∼1757)와 사별한 뒤 15세 정순왕후(1745∼1805)를 새로 왕비로 맞아들였다. 나이차는 무려 51세. 후사를 이을 장성한 아들(사도세자)이 있었기에 후궁 가운데 1명을 왕비로 세워도 될 일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영조가 굳이 ‘처녀 장가’를 간 이유는 무엇일까.

한국학중앙연구원(이하 한중연) 장서각 김덕수 전문위원은 후궁이었던 희빈 장씨를 왕비로 삼았다가 후회한 아버지 숙종이 영조의 결정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분석한다. 숙종은 희빈 장씨에게 자진하라고 명한 ‘비망기’에서 첩을 정실로 삼지 말라는 춘추의 훈계를 따르지 않은 것을 통탄한 바 있다. 김 전문위원은 “이는 숙종 이후 후궁 중에서 왕비가 나오지 않게 되는 근거가 될 정도로 결정적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말했다.

영조는 사후 첫 번째 부인 정성왕후와 함께 홍릉에 묻히길 원했다. 하지만 영조의 국장을 치른 손자 정조(1752∼1800)는 그 뜻을 따르지 않고 원릉에 묻었다. 이를 두고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음에 이르게 한 할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깔린 것이라고 야사는 전한다. 하지만 승정원일기 등에 따르면 지관 등이 살펴본 결과 홍릉 묘 자리가 좋지 않아 별도로 능을 조성한 것으로 확인됐다.

영조의 무덤에는 조선 왕으로는 유일하게 역대임금이 지은 시문인 열정어제(列聖御製)도 봉안됐다. 여기엔 영조 자신이 쓴 시문도 포함돼 눈길을 끈다. 통상 어제는 사후 편찬된다.

이런 내용은 한중연이 7일 영조의 일생과 가족관계, 치세 기록을 모아 펴낸 ‘영조대왕자료집’에 담겼다. 자료집은 총 7권으로 기획됐는데 이번에 해제집 1권과 영인자료집 3권 등 4권이 나왔다.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