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의 당직제 시행이후… 중소병원들 이유있는 반발

입력 2012-08-07 22:17


7일 경기 시흥의 신천연합병원 응급실 입구에 A4 용지 크기의 ‘8월 당직표’가 붙어 있었다. 내과, 일반외과 등 8개 진료과목별 전문의 야간당직자 명단이다. 당직표를 보면 신경외과, 신경과, 산부인과, 가정의학과 4개과의 경우 1∼31일 당직의사 이름이 모두 같다.

지난 5일부터 ‘전문의 당직제(온콜제)’가 시행됨에 따라 전국 458개 응급의료기관에는 각과에 한 명씩 전문의 야간 당직자가 배치돼야 한다. 병원 밖 대기도 가능하지만 호출하면 달려와야 한다. 병상 140석인 중급 규모의 이 병원에는 전체 8개과 중 4개과에 전문의가 한 명씩밖에 없다. 의사는 한 명이고 당직은 매일 서야 하니 1년 내내 당직자가 한 사람일 수밖에 없다.

당직 의사는 휴가도, 여행도 사실상 불가능하다. 오는 10월까지 3개월의 유예기간이 끝난 뒤에는 호출 받은 의사가 제때 도착하지 않을 경우 면허정지 처분을 받는다. 병원장은 200만원의 과태료를 물어야 한다. 결국 이 병원의 4개과 의사들은 365일 대기상태인 셈이다.

박중철 신천연합병원 가정의학과 전문의는 “규정대로라면 당직의사에게는 아예 개인 생활이 허락되지 않는다. 게다가 당직을 섰다고 다음 날 쉴 수도 없다. 오전 8시30분부터 수술을 하고 외래진료도 정상적으로 봐야 한다. 현 상태의 온콜제는 지속 가능하지 않은 비현실적인 제도”라고 말했다.

개정 응급의료법 시행규칙이 발효되면서 인력구조상 전문의 당직제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지방의 중소 병원을 중심으로 반발이 거세지고 있다. 경기 성남의 A병원은 11개 진료과목 중 6개과에 전문의가 한 명밖에 없다. 이들 6개과의 경우 한 사람이 1년 내내 당직을 서야 한다. A병원 관계자는 “매일 당직을 서야 하는 의사들 사이에는 ‘제도가 너무 비현실적이어서 뭔가 보완책이 나오지 않겠느냐’는 관망 분위기도 있다”고 전했다.

한편에서는 온콜제가 가뜩이나 어려운 지방의 응급의료기관을 고사시킬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대한병원협회 관계자는 “사생활도 없이 매일 대기해야 하는 응급실 당직을 누가 하려고 하겠느냐”며 “지역응급의료기관이 의사를 못 구해 문을 닫으면 응급환자가 더 먼 거리를 이동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고 걱정했다.

최근 충북 증평군에 단 하나 남아 있던 지역응급의료기관인 증평계룡병원은 인력난과 재정문제 때문에 문을 닫았다. 지난해 11월에는 대전의 계룡병원도 폐쇄됐다. 역시 지역응급의료기관이다. 보건복지부의 2009년 응급의료기관 평가 자료에 따르면 지역응급의료기관의 58%가 인력 기준을 채우지 못한 상태였다.

인력 사정이 비교적 괜찮은 대형 병원에서는 일부 과를 중심으로 반대 목소리가 나온다. 임상병리과, 영상의학과, 치과처럼 응급환자가 드문 경우 당직자 배치가 필요하지 않다는 불만이다. 전문의 호출을 줄이기 위한 편법도 등장했다. 부산의 한 대학병원 관계자는 “의사들 사이에서는 환자가 오면 응급실에 접수시키는 대신 바로 해당 진료과로 입원시키자는 얘기까지 나오고 있다”고 전했다. 응급실 대신 해당 진료과에 입원시킬 경우 레지던트나 인턴이 진료를 맡아도 된다.

한정호 충북대병원 소화기내과 교수는 “온콜제는 자칫 응급환자를 살리는 제도가 아니라 의사에게 법적 책임을 면하자는 면피의식만 부추길 수 있다”며 “의사에게 무한책임을 지우는 방식으로는 응급의료 체계가 개선될 수 없다”고 말했다.

이영미 기자 ym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