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시평-김동환] 悔恨의 경제민주화

입력 2012-08-07 18:54


지금 세계 경제는 D(디플레이션) 공포에 떨고 있는데 나라 안에서는 경제민주화 논쟁에 불이 붙고 있다. 살기도 어려운데 무슨 경제 민주주의 타령이냐고 언성을 높이는 이들도 있다. 경제의 위기와 민주화라는 언뜻 보기에 전혀 관계없는 두 가지 이슈가 같은 시간과 공간에 불편한 동거를 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조금만 냉정을 되찾아 외환위기 시절로부터 현재에 이르는 시간의 궤적을 더듬어 보면 이들의 관계는 결코 소원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얄팍해진 지갑을 물끄러미 바라보곤 ‘IMF 메뉴’를 제공하는 식당으로 종종걸음을 하던 샐러리맨, 얼어붙은 심신을 녹이려 지하철 역사의 구석을 찾던 실업자, 자금 마련에 실패하여 젊은 처와 어린 자식을 남겨둔 채 한 많은 세상을 뜨던 청년실업가, 훤히 트인 골프장과 도로의 쾌적함에 미소를 감추지 못하고 “이대로!”를 외치던 가진 자들의 회식자리….

시대의 변화상이 사무치게 슬펐던 ‘IMF 시대’의 풍경이다. 그리고 장기불황의 입구에서 우왕좌왕하고 있는 지금 비슷한 풍경들이 다시 그려지기 시작했다. 구미 열강들이 유럽발 경제위기로 제 살길 찾기에 바빠 우리의 어려운 사정을 돌봐주기 어렵다는 점만 빼고. 그렇다면 답은 뻔하다. 우리 스스로 활로를 모색할 수밖에 없다는 것.

주지하다시피 외환위기는 불투명하고 왜곡된 소유·지배구조를 지닌 일부 재벌기업의 방만한 투자와 차입경영 때문에 발생했다. 그리고 당시 정부는 IMF 외환위기의 길고도 어두운 터널에서 벗어나기 위해 시장원리가 통하고 민주주의와 조화를 이루는 경제시스템을 구축하고자 했다. 다시 말해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처방전으로 경제민주화를 제시했던 것이다.

시장원리가 통하는 경제시스템이란 모든 기업이 자유롭고 공정하게 경쟁할 수 있는 환경을 의미한다. 이런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정부는 ‘5+3 원칙’을 세우고 채권은행-채무기업 간 자율 ‘협약’에 의해 기업구조조정을 추진하였다. 5+3 원칙이란 주력사업으로 역량 집중 등 5가지 핵심과제와 재벌기업의 금융지배 차단(즉 금산분리), 순환출자 억제, 부당내부거래 근절 등 3가지 보완과제를 의미한다. 요즘 인구에 회자되는 경제민주화의 주요한 내용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처럼 무거운 과제를 법적 구속력이 없는 협약에 의해 추진했던 까닭은 자유를 존중하는 동시에 자유에는 반드시 책임이 따른다는 민주주의의 기본원칙을 지키기 위함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시장원리가 통하는 경제시스템을 확립하려다 성장에 빨간불이 켜지는 것은 아닌지 하는 의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고, ‘시장원리 확립’보다 ‘경제 살리기’가 더욱 중요하다는 주장에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 경제 살리기를 위한 ‘자유론’만 팽배했지 시장원리 확립의 ‘책임론’은 고개를 감추고 말았다.

이에 편승하여 재벌기업들은 다시 계열사 일감 몰아주기, 문어발식 사업 확장, 금융회사 인수·합병 등에 열을 올렸고, 결국 5+3 원칙의 상당수는 여전히 미완의 과제로 남겨졌다. 그 후 우리 경제는 시나브로 성장동력을 잃고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 샌드위치 신세가 되어 갔다. 지금 여야 구분 없이 경제민주화를 외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경제 살리기의 목적은 모든 경제주체를 행복하게 하는 데 있을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 ‘책임’을 지지 않는 한 ‘자유’는 이 목적을 달성하는 데 실패하고 만다. 경제민주화는 자유를 구속하는 것이 아니라 책임 있는 자유, 즉 자치를 촉구하는 것이다.

자치할 수 없는 개인과 기업이 넘쳐나는 나라에 민주주의가 뿌리를 내릴 수 없고, 민주주의가 정착되지 않은 나라가 경제선진국이 되었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다. 경제민주화가 정치적 구호로만 그쳐서는 더 이상 안 된다.

김동환 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