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조성기] 눈물과 기쁨의 환호성

입력 2012-08-07 19:32


히브리 민족이 70년의 바벨론 포로생활을 마치고 이스라엘로 돌아올 때 어느 시인이 지은 시가 시편 126편으로 남아 있다. 거기에는 꿈꾸는 것 같은 감격이 담겨 있다.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혀에는 찬양이 찼다고 했다. 그리고 시련의 역사를 통하여 배운 귀중한 교훈을 후손들에게 물려주고 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시 126:5) 이 구절에서 기쁨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원어는 ‘린나’이다. 린나는 기쁨이라는 의미보다 ‘외침’이라는 뜻이 강하다. 기쁨의 외침, 슬픔의 외침이 린나이다. 여기서는 기뻐서 환호성을 지르는 그 외침을 의미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부끄러움 거두는 부패의 악습

요즈음 눈물의 훈련 기간을 거쳐 극적으로 승리한 올림픽 선수들의 환호성에서 린나의 의미를 새롭게 되새기게 된다. 김지연을 비롯한 남녀 펜싱 선수들의 환호성, 축구 종주국 영국의 자존심을 꺾으며 승부차기로 승리한 축구 선수들의 환호성, 그 경기를 밤새도록 지켜보던 시청자들의 환호성, 올림픽 역사상 처음으로 금메달을 획득한 기계체조 도마 부문의 양학선 선수와 체조 관계자, 국민들의 환호성 등등 비명과도 같은 그들의 환호성이 바로 린나이다.

물론 다른 나라 선수들의 환호성에서도 그들의 눈물겨운 훈련과 기쁨의 감격을 짐작하게 된다. 그러면서 우리 자신도 새로운 인생의 다짐을 하게 된다. 우리 인생이 비록 시련과 어려움 가운데서 많은 눈물을 흘리더라도 낙심치 않고 의미 있는 씨를 뿌려나갈 때 마침내 기쁨의 환호성을 지르며 열매를 거둘 때가 반드시 있을 것이다. 하루하루 영적인 정신적인 전투에서 가까스로 혹은 넉넉히 승리할 때도 기쁨의 환호성을 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뇌물로 씨를 뿌려 부끄러움으로 거두는 정치인들의 소식이 우리를 씁쓸하게 한다. 공천헌금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정치사에서 공공연한 관습으로 비공식적으로는 당연시 되어 왔다. 특히 비례대표로 공천되기 위해서는 수억, 수십억원의 헌금을 내야 한다는 소문이 널리 퍼져 있기도 했다. 이런 모든 악습을 끊기 위해서 당명까지 바꾼 정당에서 또 공천헌금과 관련된 불미스런 일이 벌어졌으니 빛 좋은 개살구라는 소리를 들을 만하다.

그런데 이런 악습이 한국 교회에도 깊숙이 뿌리박고 있는 현실을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안수집사나 장로직에 임명되기 위해서는 엄청난 액수의 헌금을 감사헌금 명목으로 내야 한다는 것은 대부분의 교회에서 공공연한 관습이 되고 있다. 그 귀중한 직분을 받으면서 감사헌금을 내지 않는 것은 교인으로서 몰지각한 일로 치부된다.

기쁨의 열매 맺는 씨 뿌려야

정당의 공천헌금 논리와 별 다를 바 없는 일이 교회 안에서 벌어져도 문제의식조차 가지지 않는다. 이런 악습에서부터 정당의 부패가 시작되듯이, 바로 이런 데서 교회와 교단의 부패도 싹트기 마련이다. 저축은행 비리의 주축들이 소금 운운한 모임의 교회 장로들이라는 점은 사회의 부패가 교회로, 교회의 부패가 사회로 그대로 확산될 수 있음을 보여준 주요한 사례로 꼽힌다. 눈물로 씨를 뿌린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회개의 눈물과 세상 수단을 의지할 수 없는 막막함에서 오는 눈물과 순수한 열정에서 우러나는 눈물로 씨를 뿌린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 땅의 정치인들뿐만 아니라 교회와 사회 각 곳의 일꾼들이 이런 눈물로 씨를 뿌려 기쁨의 환호성을 지르며 열매를 거두는 역사가 있으면 좋겠다고 올림픽 기간에 다시금 소원해본다. 사도 바울도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이렇게 권면하고 있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조성기(소설가·숭실대 문예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