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오경아] 느림의 위로
입력 2012-08-07 19:29
고사리 순이 땅위로 올라서는 모습을 본 적 있는지. 마치 주먹을 꼭 쥔 것처럼 돌돌 말려진 순은 시간이 지나면 말아놓은 것들을 서서히 펼쳐 거대한 고사리 잎을 만든다.
생명의 진화를 뜻하는 영어의 evolution은 라틴어로 ‘말려진 것을 펴는 것’이다. 훗날 이 말을 ‘종의 기원’을 쓴 찰스 다윈이 빌려 쓰면서 ‘생명이 점진적으로 변해가는 현상’을 뜻하는 과학용어로 굳어진다. 그런데 이 변해가는 현상은 나쁜 쪽이 아니라 좀 더 나아지는 쪽을 의미한다. 사실 지구에 살고 있는 모든 생명체는 더 강해지고, 더 오래 살기 위한 진화에 몸부림치고 있다. 생태계의 가장 꼭대기에 있는 우리 인간의 노력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진화가 정말 생명체에 좋은 일이었을까?
공룡이 살았던 시절, 왜 그들이 그렇게 감쪽같이 사라졌는지 알 수 없는 그때, 지구에 살았던 식물이 있다. 여러 차례에 걸친 빙하기에 지구는 공룡은 물론이고 모든 식물까지 얼려버렸다. 하지만 이 식물은 빙하기마저 이겨내고 생명을 지속했다. 1945년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졌다. 주변 수 ㎞는 살아남은 생명체가 거의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폭탄이 떨어진 중심부에 나무 여섯 그루가 살아남았고 지금도 잘 자라고 있다. 대체 이 식물은 무엇일까? 바로 은행나무다.
은행나무의 신비는 지금도 풀 길이 없다. 나무 자체는 산화력이 강해 온갖 박테리아, 바이러스, 벌레도 뚫지 못하고, 공해에도 끄떡없다. 이 엄청난 생명력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걸까? 일부 학자는 진화를 거부한 은행나무의 독특한 ‘느림’에서 이유를 찾는다.
은행나무는 번성했던 쥐라기 때와 비교해 거의 변화가 없다. 성장도 얼마나 느린지 중국 황제는 자신이 심은 은행나무에서 딴 은행을 먹어보겠다고 평생을 기다렸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성장이 느리고, 급변하는 환경에 맞춰 굳이 변화하려고 애쓰지 않고, 참 굳건하게 자신의 삶을 이어온 셈이다.
신기하게 이런 변화에 둔감한 은행나무가 지구상의 그 어떤 생명체보다 튼튼하게, 오래 잘 살고 있다. 진화의 진정한 목적을, 진화를 거부하며 이룬 셈이다.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일까? 나 역시도 좀 더 튼튼하고, 좀 더 오래 살고 싶은 진화의 욕심이 있다. 그런데 그 진화의 답이 꼭 재빠른 환경의 적응, 숨 가쁜 변화에만 있지는 않을 듯하다. 빠른 사회 변화에 적응 못하는 나를 ‘느림’으로 위로해 보는 뜨거운 여름이다.
오경아(가든 디자이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