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코너-배병우] ‘섹시함’에 중독된 한국

입력 2012-08-07 19:27


여행을 하다보면 전에는 당연하게, 또는 무감각하게 여기던 현상들이 새로운 의미로 다가올 때가 있다. ‘익숙한 것들로부터 거리두기’ 정도로 요약되는 이것이 여행의 중요한 가치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미국에 거주하면서 한국 사회의 ‘상식’ 중 이질적으로 다가오는 것의 하나가 ‘성(性) 문화’다. 우리 사회가 여성의 상품화, 음란물에 너무 관대하다는 깨달음이다. 7년 만에 최근 한국을 다녀왔다는 한 교민도 기자와 비슷한 느낌을 토로했다. 그는 “여성들의 옷차림이 너무 야해지고 대중매체에서도 음란물이 넘쳐나 놀랐다”며 “왜 그런 것이냐”고 물었다.

개인의 자유가 다른 무엇보다 우선이고 성이 개방된 미국 사회가 훨씬 더 심할 텐데 무슨 소리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기자 집의 TV에는 60여개 지상파와 케이블 채널이 나온다. 하지만 낮에는 물론이고 심야에도 청소년들이 보지 말아야 할 정도의 노출 장면이 나오는 방송 프로그램을 본 적이 거의 없다.

물론 ‘제리 스프링거 쇼’처럼 욕설과 천박한 대화가 태반인 프로도 적지 않다. 하지만 한국처럼 자정만 넘으면 노골적인 성애영화가 전파를 타고 일반 가정의 TV에 등장하는 경우는 상상하기 어렵다.

인터넷만 해도 그렇다. 한국 인터넷 사이트에는 음란물이나 성에 관련된 콘텐츠가 없는 경우가 거의 드물다. 주요 언론매체의 홈페이지에도 성에 관련된 광고가 빠짐없이 들어 있다.

뉴욕타임스나 월스트리트저널에 성 기구나 정력제 광고가 자리를 차지하고 들어 있는 격이다. 그런데 미국 주요 신문 홈페이지에서 이런 것을 본 기억이 없다. 시청률에 올인하는 예능프로는 물론이고 진지한 뉴스 프로그램마저 ‘섹시함’으로 눈길을 끌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한국 TV에서 여자 아나운서와 기상캐스터가 야한 복장을 입고 나와 방송을 진행해 논란이 된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각종 TV 프로그램에서 ‘여성은 외모가 모든 것’이라는 인식을 노골적으로 심어주는 것도 한국만의 현상이다. 뚱뚱한 여성을 놀리고 희화화하는 게 일상사인 예능프로그램은 미국에서라면 시민단체나 시청자들의 거센 항의로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미국 방송에서도 예쁘고 날씬한 여성에 대한 선호가 분명히 있다. 하지만 한국은 그 정도가 강박적일 정도로 심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여성의 인격이나 능력은 차치하고 모든 것을 외모로 재단하는 외모지상주의가 방송의 표준처럼 되고 있다.

K팝이나 아이돌 열풍과 관련해 미국에서 다른 시각도 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긍정적인 평가가 우세하지만 어릴 때부터 조직적으로 스타를 제조하고, 10대들의 성적 매력을 교묘하게 포장해 성인들에게 팔고 있다는 비판도 엄연히 존재한다.

미국 사회의 성 문화가 유일한 기준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최근 한국에서 성 관련 강력 범죄가 잇따르는 상황은 넘쳐나는 음란물과 성의 상품화에 대한 정부와 사회의 대응에 문제가 있다는 신호로 받아들여야 한다.

음란물과 관련한 대책을 세우는 과정에서 미국의 소비자단체, 교회, 교육·학부모 단체들의 역할을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들이 최소한 가정에는 음란물의 영향이 미치지 않도록 인터넷과 방송 프로그램을 감시하고 광고주나 방송사에 압력을 행사하는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워싱턴=배병우 특파원 bwb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