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애란 (22) 할머니, 압록강변에서 “탈북해 서울로 가자”

입력 2012-08-07 18:06


1996년 4월 결혼을 하게 됐다. 지인의 소개로 만난 사람이었는데 직업이 의사였다. 북한에서 의사는 남한에서처럼 그렇게 잘 나가는 직업은 아니다. 단지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직업이라 그런지 그저 밥 먹고 살 정도였다.

1년쯤 뒤 떡두꺼비 같은 아들을 낳았다. 한데 출산 13일째 중국에서 갑자기 연락이 왔다. 낯선 사람이 우리 집 문을 두드리며 지금 압록강에 친척이 기다리고 있으니 빨리 나와 보라는 것이었다.

친척이 찾아와 강에서 기다린다고? 믿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사회안전부와 보위부, 당, 행정기관 합동으로 이른바 ‘비사회주의 그루빠’가 조직돼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는 상황에서 외지인과의 접촉은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친척이 기다린다고 하니 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어머니가 저녁을 짓다 말고 강가에 나갔다. 우리와 평소 알고 지내던 조선족인 최 선생이 나와 내일 친척과 올 테니 마중을 나오라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이 소식을 듣고 와서는 무서워 부들부들 떠셨다. 한평생 출신성분 때문에 기를 못 펴고 살아오신 어머니는 중국에 온 미국 친척을 만난 것이 발각되면 큰일이 생길까봐 걱정이 되셨던 것이다.

다음 날 아침 나와 어머니는 미국에서 온 고모부와 사촌동생 혜리를 만났다. 강가에 앉아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국경경비대가 나타나 나를 붙잡았다. 국경경비대에 끌려가면서 여러 번 발길에 차이고 매를 맞았다.

어머니가 출산한 지 한 달도 안 된 애기 엄마를 그렇게 때리는 법이 어디 있느냐고 항의했지만 막무가내였다. 국경경비대 대원들은 어머니를 앞세우고 우리 집을 수색했다. 또 내게 강가에서 누구를 만났느냐고 추궁했다. 나는 중국 친척에게 출산 후 병이 나 약을 좀 구해다 달라고 부탁했다고 둘러댔다. 하지만 국경경비대 대원들은 좀처럼 보내주지 않았다.

갓 태어난 아기가 배고파 울고 있다고 통사정을 했는데도 말이다. 젖이 퉁퉁 불어 미칠 것 같았다. 그들은 저녁 늦게야 풀어 주었다. 집에 돌아와 보니 아기는 배가 고파 울다 지쳤는지 곤히 잠들어 있었다.

며칠 후 최 선생은 혜산에 와 할머니와 고모부가 보낸 쌀과 옷, 3000달러를 전달했다. 우리는 너무 무서워 밤중에서야 맡겨놓은 쌀을 날라 왔다. 얼른 장롱에다 쌀을 숨겼다. 짐에는 남한 상표인 쌍방울 내의도 있었는데 정말이지 내의가 얼마나 좋은지 몰랐다.

우리는 필요한 내의만 챙기고 나머지는 몰래 장터 사람에게 넘겼다. 다음 날 시장에 나갔는데 한 아주머니가 가만히 다가와서 쌍방울 내의가 더 있으면 자기가 팔아줄 테니 달라고 했다.

너무 당황해 없다고 했더니 그 아주머니는 다 안다고 하면서 “남조선 상품은 잘못 팔다 들키면 모두 몰수당하니까 자기가 안전하게 팔아주겠다”고 은근히 위협까지 했다. 하는 수 없이 쌍방울 내의를 다 팔았다. 시장에서 쌍방울 내의는 1500원 하는데, 이 아주머니는 우리한테 800원에 사서 1250원을 받고 하루 만에 다 팔았다.

할머니가 쌀을 300㎏이나 보내 우리 가족은 쌀밥을 실컷 먹게 됐다. 갑자기 돈과 쌀이 생기고 친척이 나타나니 좋아해야 할지 나빠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무언가 불안하고 무섭고 떨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중국에서 또 연락이 왔다. 할머니가 현재 중국에 와 계시며 우리를 서울로 데려가려 하신다는 것이었다.

“아니 서울이 어딘데, 우리가 서울엘 간단 말인가….”

도저히 믿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차라리 전쟁이라도 터져서 혼란이 오면 모르지만 경계가 심한 북한을 떠나 남조선으로 간다는 것은 정말 불가능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군다나 우리 가족은 10명이나 되지 않는가. 갓난아기와 병든 노인까지 데리고 탈북한다는 것은 한 번도, 정말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는 큰일이었다.

정리=유영대 기자 ydyo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