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 인문학] 종교의 자유와 관용을 설파한 철학자 존 로크 (中)
입력 2012-08-06 18:02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의 평화유지를 위한 ‘사회계약’ 주장
“정부의 목적은 인류의 복지이다. 그렇다면 인민이 항상 폭군의 무제한적 의지에 신음하는 것과 통치자가 권력을 방만하게 행사할 때 그리고 권력을 인민의 재산을 보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파괴하기 위해서 사용할 때 종종 저항을 하는 것 중 과연 어느 편이 인류에게 최선인가?”
로크가 ‘통치론’에서 전제에 대한 혁명을 정당화하면서 한 말이다. 흔히 로크의 통치론은 명예혁명을 옹호하고 영국 정치를 지배하게 된 휘그당의 원칙을 정당화하기 위해 저술된 것으로 인식돼 왔다. 그러나 로크는 명예혁명 전부터 통치론을 써왔다. 로크의 통치론은 사실상 제임스 2세를 겨냥한 것이었다. 로크는 가톨릭교도인 요크 공 제임스를 왕위계승에서 배제시키려는 새프츠베리를 이론적으로 지지하려는 의도에서 통치론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새프츠베리의 국왕 암살 음모가 탄로 나자 로크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네덜란드로 도피하는 바람에 통치론을 출간할 수 없었다.
제임스 2세는 최대의 정적 새프츠베리가 망명지 네덜란드에서 죽자 의회를 자신을 지지한 다수의 토리당원으로 채웠다. 그러나 가톨릭교도인 제임스 2세와 영국 국교도인 토리당원들은 심각한 갈등을 빚었다. 제임스 2세는 이른바 종교적 자유를 내세우면서 심사법을 무시했다. 심사법이란 영국 국교회 신자가 아닌 사람은 공직에 임명될 수 없도록 하여 사실상 가톨릭교도의 공직 취임을 배제한 것이었다. 제임스 2세는 심사법 폐지를 의회에 제출했다가 부결되자 왕권으로 심사법 폐지를 선언했다. 그렇게 해서 그는 로마 가톨릭교도들을 관리로 채용했고, 정치에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 토리당이 지배하는 영국의회는 제임스 2세의 심사법 폐지를 영국 국교회를 붕괴시키는 행위로 간주했다.
제임스 2세는 갈수록 전제 군주의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의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절대 왕권을 구축하기 위해 많은 로마 가톨릭교도를 포함한 상비군을 구성했다. 이 상비군으로 스코틀랜드에서 찰스 1세의 서자인 몬머스 공작이 일으킨 반란을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제임스 2세는 1688년 영국의 모든 교회에서 종교 양심의 자유 선언을 낭독하라는 칙령을 반포했다. 이것은 실제로 가톨릭교를 인정하라는 포고였다. 캔터베리 대주교 윌리엄 샌크로프트와 6명의 주교가 이에 반대했다가 런던탑에 수감됐다.
1688년 4월 재혼한 이탈리아 출신의 가톨릭교도 왕비 마리 모데나가 아들을 낳자 의회와 영국민의 불안은 최고조로 달했다. 서로 대립하던 토리당과 휘그당은 영국에 가톨릭 왕국이 세워질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을 느끼고 동맹을 맺고 국왕에 맞섰다. 영국 의회는 제임스 2세의 왕위 계승자인 그의 딸 개신교도 메리와 남편 윌리엄에게 몇 차례의 초청장을 보냈다. 월리엄은 제임스 2세의 조카이자 사위였다.
제임스 2세의 전횡으로 인한 영국의 불안정한 상황은 네덜란드에 망명해 있던 로크에게 정치적으로 재기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는 네덜란드 사람인 오렌지공 월리엄을 영국 왕으로 옹립하려는 거사에 참여했다. 1688년 11월 5일 윌리엄 오렌지공은 거사를 결심하고 ‘자유로운 의회와 신교 보호’란 구호 아래 런던으로 진격했다. 제임스 2세는 자신의 군대만으로 충분하다고 믿고 프랑스 루이 14세의 도움을 거절했다. 프랑스인들에 대한 영국국민들의 반발을 우려해서다.
막상 적이 쳐들어오자 제임스 2세는 혼란에 빠져 수적으로 많은 군대를 가지고도 공격조차 하지 못했다. 런던시민들이 그에게 지지를 보내지 않은 것도 큰 충격이었다. 결국 제임스 2세는 싸워보지도 못하고 프랑스로 망명의 길을 떠나야 했다. 덕분에 유혈사태 없이 정권이 바뀌었다. 이것이 영국인들이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명예혁명’(Glorious Revolution)이다. 1688년 명예혁명이 끝나고 이듬해 2월 로크는 개인 비서 자격으로 메리 공주를 영국으로 수행했다. 메리 공주는 월리엄 3세와 더불어 영국의 공동 왕으로 즉위하였다.
로크는 1689년 11월쯤 통치론을 출간했다. 그는 통치론에서 전제 정치를 행하는 권력자의 소환과 국민의 저항권을 주장했다. 만약 권력자가 법률을 어기고 전제를 행한다면 국민은 혁명으로 그를 퇴위시킬 수 있다.
로크의 통치론은 영국 근대 정치 철학의 교과서가 되었다. 로크는 이 책에서 자연법, 사회계약론, 권력 분립론 등을 주장했다. 홉스가 자연 상태를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로 가정했다면 로크는 자연 상태는 완전한 ‘자유’와 ‘평등’이 존재하며 비교적 평화롭다고 가정한다. 자연 상태에서는 자연법이 지배한다. 이 자연법은 신에게서 나온 것으로서 모든 사람들은 이 자연법을 따라야 한다.
로크가 생각하는 자연법은 생명, 자유, 재산에 대한 권리다. 이러한 권리 중에서 가장 관심을 끄는 것은 사유재산권에 대한 로크의 정당화이다. 자연물은 원래 공공의 것이다. 그러나 그것에 노동을 가할 경우 그것은 그의 개인적 소유가 된다. 이 소유권은 국가보다 선행하기 때문에 국가에 의해 박탈될 수 없는 것이다. 누구도 이러한 권리를 침해해서는 안 된다.
로크는 인간을 포함해 신이 창조한 자연을 유지하는 것이 자연법의 최상의 규칙이라고 보았다. 이 자연법을 따르면 자연 상태는 자유롭고 평화로울 것이다. 그러나 자연 상태에서 모든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재판관’이기 때문에 언제든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일어날 수 있다. 이러한 투쟁을 방지하기 위해 사람들은 ‘사회 계약’을 통해 평화와 자기 보존을 목적으로 입법, 사법, 행정의 권리를 국가기구에 양도하게 된다.
국가 권력의 의무는 개인의 자유와 소유를 지켜주고, 전체의 안녕을 위한 평화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그러나 로크는 전제적 국가 권력의 위험을 피하기 위해 권력을 상이한 기관에 속하게 하는 권력 분립을 주장한다. 로크는 입법부와 행정부의 권력분립을 주장했다. 입법부는 최고의 권력기관이지만, 법을 만드는 사람이 스스로 그것을 집행해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기에 행정부가 따로 기능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런 로크의 권력분립론은 나중에 몽테스키외의 삼권분립론에 영향을 끼쳤다. 로크가 주장하는 권력분립론이나 왕의 소환권이나 국민의 저항권은, 따지고 보면 로크의 독창적인 생각이라기보다는 왕권과 의회파 사이의 갈등하던 영국 역사를 반영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로크가 네덜란드에서 보낸 약 5년간의 망명 생활은 외롭고 괴로운 고통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술가나 사상가들에게 망명 기간은 오히려 집필에 몰두할 수 있는 기간이기도 했다. 단테가 그런 기간에 ‘신곡’을 쓰고,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을 쓴 것처럼, 로크는 이 시기에 ‘관용에 관한 편지’, ‘통치론’과 ‘인간지성론’을 집필했다.
‘관용에 관한 편지’는 로크가 종교에 관한 문제를 다룬 서한이다. 그가 네덜란드에 있을 때인 1685년 10월 루이 14세는 낭트 칙령을 완전히 철폐했다. 앙리 4세는 1598년 4월에 낭트에서 프랑스의 개신교도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는 칙령을 공포했다. 그러나 루이 14세는 개신교 국가 전체를 적으로 삼고, 국내의 개신교도들을 강제로 개종시키려 했다.
낭트 칙령의 폐지를 계기로 유럽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종교의 관용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다. 로크는 이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개진한 글을 네덜란드의 항명파 신학자 립보르흐를 수신인으로 해서 편지형식으로 썼다. 로크는 이 편지를 출판할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로크의 편지는 영어로 번역돼 그가 영국으로 귀국한 지 3개월 후인 1689년 5월에 출간되었다. 종교의 관용이 절실하게 필요하였던 유니테리언이자 상인인 윌리엄 포플이 로크의 허락도 없이 편지를 출간한 것이었다. 유니테리언은 그리스도교의 정통 교의인 삼위일체론의 교리에 반하여,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유일한 신성만을 인정했다. ‘관용에 관한 편지’가 출판되자 로크는 본의 아니게 종교 논쟁에 휘말리게 된다.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