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품값 어떻게 매기나] 법정으로 간 ‘89억’… 그림값의 진실은?
입력 2012-08-04 06:48
화랑이나 미술품 경매장에 들러 그림 가격을 살펴본 적이 있는지. 몇 백 만원부터 몇 억원까지 천차만별이다. 일반인들에겐 ‘그림의 떡’이라고나 할까. 국내 최대 미술품 경매사인 서울옥션과 금융사인 하나캐피탈이 최근 ‘그림값 소송’을 벌이면서 그림값은 어떻게 매기는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이를 계기로 미술품 가격의 모든 것을 알아본다.
#160억원과 70억원의 차이
미국 화가 사이 톰블리(1928∼2011)의 1969년 작품 ‘볼세나(Bolsena)’가 지난 5월 뉴욕 경매사인 ‘필립 드 퓨리’ 경매에서 624만 달러(약 71억6000만원)에 낙찰됐다. 위탁자는 하나캐피탈이었다. 서울옥션이 지난해 9월 1200만∼1500만 달러(약 130억∼160억원)의 가치가 있다고 감정한 작품이다.
하나캐피탈은 미래저축은행 유상증자에 145억원을 투자하면서 톰블리의 ‘볼세나’, 박수근의 ‘두 여인과 아이’, 김환기의 ‘무제’ 등 그림 5점을 담보로 받았다. 이후 ‘볼세나’ 등 4점을 매각하고 받은 금액은 87억2000만원. 서울옥션이 최대 160억원이라고 평가한 그림값이 절반가량으로 뚝 떨어진 것이다.
이에 하나캐피탈은 지난 6월 서울옥션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서울지방법원에 냈다. 하나캐피탈은 “미술품이 실제보다 높게 감정된 탓에 원금을 보전하지 못했다. 투자금 145억원 중 그림 판매액을 빼고 이자와 지연손해금을 더한 60억원의 손해를 봤다”고 주장했다. 반면 서울옥션은 “당시 합당한 감정가격을 제시했다”며 맞서고 있다.
#부르는 게 값이다?
왜 이토록 가격 차이가 많이 나는 것일까. 사실 그림은 “부르는 게 값”이라는 인식이 미술계 안팎에 널리 퍼져 있다. 전시 작품을 판매하는 화랑의 경우 작가와 협의를 거쳐 호당(1호는 우편엽서 크기) 가격을 매기는 게 일반적이다. 이 과정에서 그림값이 부풀려지기도 하고 축소되기도 한다. 주먹구구식으로 책정되는 그림값에 미술품 애호가는 속수무책이다.
국내 활동을 왕성하게 벌이는 A원로작가는 얼마 전 전시를 열면서 “호당 500만원 이하는 절대 안 된다”고 선을 그었다. 비슷한 연령의 B원로작가 작품이 국내외 경매에서 호당 500만원 이상에 낙찰된 것을 염두에 둔 가격 제시였다. 작품의 완성도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고 경쟁 작가의 작품 가격에 신경을 쓰다보니 그림값이 왜곡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화랑의 그림 가격은 경매 출품작의 참고자료로 활용된다. 경매에 한 번도 출품되지 않은 작가의 경우 화랑 가격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C작가의 작품이 화랑 전시에서 1억원에 팔렸다면 경매에서도 추정가를 비슷하게 정하게 된다. 하지만 경매 이력이 많은 인기 작가나 해외 유명 작가는 각종 자료를 근거로 그림값을 매긴다.
#가격감정은 스페셜리스트의 몫
경매사 직원은 크게 두 가지 부류다. 출품작을 선정하고 가격을 책정하는 스페셜리스트가 있고, 경매를 진행하는 경매사가 있다. 스페셜리스트는 어떤 컬렉터가 누구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지 훤히 꿰고 있다가 특별경매 등에 출품을 의뢰한다. 출품작이 선정되면 경매에 부치기 전에 진위감정과 가격감정을 실시한다.
진위감정은 한국미술품감정협회 등 외부 기관에 위탁하거나 자체 감정위원을 동원한다. 서울옥션은 고미술품, 현대미술품, 해외미술품 등 세 분야에 각각 2∼3명씩 감정위원을 두고 있다. 진품으로 판명되면 스페셜리스트들이 가격감정에 들어간다. 국내 양대 경매사 중 서울옥션에는 15명, K옥션에는 8명의 스페셜리스트가 활동 중이다.
스페셜리스트의 경력은 5∼10년 정도. 가격을 책정하기 위해서는 이전에 팔린 비슷한 작품의 가격이 얼마인지, 그림 크기는 어느 정도인지, 작가의 전성기 시절 작품인지, 어떤 전시장에서 전시됐는지, 그동안 소장자는 누구인지, 어떤 도록에 실렸는지 등을 세밀하게 점검한다. 이후 전체 회의를 거쳐 그림값을 매긴다.
#경매 낙찰 기록을 찾아라
해외 작가 작품은 국내 경매에 부친 사례가 드물기 때문에 해외 경매사의 경매 기록이 중요한 자료가 된다. 세계적인 권위를 지닌 해외 경매사는 뉴욕에 본사를 둔 크리스티와 소더비가 있다. 경매 때마다 역대 최고가 기록을 경신하는 양대 경매사에서 낙찰된 작품의 가격은 다른 나라의 경매에서 거의 비슷하게 적용된다.
서울옥션이 톰블리의 ‘볼세나’ 가격을 책정한 근거는 소더비 경매 기록이다. 최윤석 서울옥션 부장은 “뉴욕에서 활동하던 톰블리가 유럽으로 이민을 떠나 독창성이 더해진 ‘회색시대’(1966∼1970) 작품 중 하나”라며 “비슷한 시기의 작품이 지난해 5월 소더비 경매에서 1500만 달러(약 160억원)에 낙찰된 적이 있다”고 설명했다.
같은 작가의 비슷한 작품인데 낙찰가가 왜 이렇게 큰 폭으로 떨어졌을까. 미술 전문가들은 상대적으로 인지도가 낮은 경매사인 ‘필립 드 퓨리’에서 매각된 것과 하나캐피탈이 투자금 회수를 위해 급매물로 내놨기 때문으로 분석하고 있다. 고가의 미술품이 급매물로 나왔다는 소문이 돌면 가치가 급격하게 떨어지는 경향이 있다.
#들쭉날쭉한 그림값의 기준은 없나
위탁자가 제시한 가격과 경매사에서 책정한 가격이 맞지 않으면 출품은 이뤄지지 않는다. 위탁자는 최고가를 받기를 원하고 경매사는 최고가는 아니더라도 낙찰시키는 게 우선이다. 특정 작품에 응찰자가 대거 몰려 추정가보다 수십 배 오르는 경우도 있다. 미술시장이 호황을 이룬 2005∼2006년 이우환 오치균 홍경택 등 작가의 작품이 그랬다.
그러다 보니 경매 출품이 잘 나가는 일부 작가에만 국한되는 한계를 드러내기도 했다. 또 인기 작가들의 경우 추정가를 지나치게 높게 책정해 미술시장 거품이 빠지면서 그림값이 급락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가격에만 관심을 쏟고 작가 발굴 등을 통한 건전한 미술시장 조성은 뒷전인 측면도 없지 않다.
경매사별로 낙찰 기록을 데이터베이스화하고 있지만 작가와 작품별로 면밀한 분석을 통해 공정한 가격을 도출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김영석 한국미술시가감정협회 이사장은 “객관적인 가격 산정을 위한 ‘미술작품 가격지수’를 개발하고, 작품가격에 영향을 미치는 ‘예술적 가치’를 정량화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이광형 선임기자 g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