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의 희망지기-김원균] 세상은 그들을 ‘죄인’이라 부르지만 하나님 품 안에선 모두 ‘자식’입니다

입력 2012-08-03 17:44


소년원 11곳에 교회 세운 김원균 겨자씨선교회 목사

지난해 10월 폭행 사건에 휘말려 서울소년원에 온 이준명(18·가명)군은 최근 두 명의 양아버지가 생겼다. 형기를 마친 뒤 본격적으로 권투를 지도해 줄 자원봉사자와 김원균(62) 겨자씨선교회 목사가 그들이다. 소년원생을 ‘아들’이라 부르는 김 목사가 준명이의 꿈이 권투선수라는 걸 알고 소년원 자원봉사자인 고 최요삼 선수(WBC WBO 플라이급 세계챔피언)의 양아버지 박태훈 전 숭민프로모션 사장을 이어준 것이다.

인생의 멘토와 신앙의 아버지가 생긴 이군에겐 이제 목표가 있다. 4년 뒤 올림픽에 국가대표로 출전해 금메달을 목에 거는 것. 그는 “나쁜 일을 저질러 소년원에 다시 들어왔지만 목사님을 만난 뒤 내게도 꿈이 생겼다”며 “나가서도 계속 운동해 권투로 대학도 진학할 것”이라며 당당하게 말했다.

34년간 국내 소년원 11곳에 교회를 세운 김 목사에겐 이군과 같은 아들이 500명이 넘는다. 그는 소년원 퇴원 후 갈 곳 없는 이들에게 검정고시를 통해 공부를 계속하도록 하거나 비록 이른 나이지만 일자리를 소개해 사회에 진출하도록 돕기도 했다.

그를 본받아 목회자나 선교사가 된 아들도 11명이나 된다. 지난달 6일 서울 서초동 서울지방검찰청사에서 상영된 다큐멘터리 ‘소년원 출신 성공인사’의 주인공 가운데 한 명인 박관일 탄자니아 선교사도 그가 사랑으로 키운 아들이다.

지난달 27일 경기도 의왕시 서울소년원 기독교실에서 만난 김 목사는 이들의 양육 비결을 ‘기적’이라고 밝혔다. 세상의 ‘죄인’에서 ‘바른사람’이 되기까지는 하나님이 섭리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게 그의 확신이다.

약속을 기억해내다

충남 아산에서 태어난 김 목사는 교회학교 선생님의 전도로 열한 살 때 처음 교회에 나갔다. 전기도 없던 시절, 예배당은 그에게 새로움과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학교에서 공부하는 것보다 교회에서 지내는 것이 훨씬 좋았다.

열두 살 어린 나이였지만 그는 막연하게 목회자의 꿈을 꾸는 계기를 경험했다. 성극 ‘선한 사마리아인’ 공연을 통해서였다.

“주인공 연기를 하는데 제 마음에 ‘아, 나도 이렇게 살아야겠구나’라는 막연한 감동이 왔어요. 그래서 연극을 마치고 바로 어머니께 달려가 얘기했죠. ‘나도 어른이 되면 불쌍한 사람을 돕는 교회 전도사님이 되겠다’고.”

하지만 정작 성인이 되면서 그는 다른 길을 택했다. 자신이 목사가 되면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 것만 같았다. 확신이 없을 바엔 목사가 되지 말자고 생각한 그는 여러 직장을 돌며 기술을 배우다 군에 입대했다.

군복무를 하던 어느 날, 그는 온 몸에 극심한 통증을 느꼈다. 군의관은 “창자가 썩는 병인데 원인을 알 수 없다”며 무려 28일간 고단위 항생제를 줬다. 그를 다시 부른 군의관은 비장한 표정으로 “현대의학으로 불가능한 병”이라면서 “서울의 한 병원에 독일에서 유학한 의사가 있으니 그를 찾아가라”며 진료의뢰서를 건넸다.

경기도 양평의 부대에서 나와 병원으로 가는데 온 몸에 열이 났다. 그때 불현듯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내가 어릴 때부터 목회자가 되기로 서원해 놓고 지키지 못했다, 하나님께 돌아가야 살겠구나!’ 김 목사는 병원 대신교회에 가는 절체절명의 결단을 내린다.

“의사에게 가도 죽을 거, 교회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요일 아침 교회로 가서 ‘살려만 주면 꼭 신학하고 주의 종이 되겠다’고 기도했지요. 얼마나 간절히 기도했던지 온 몸이 땀에 젖고 군화 속이 땀으로 흥건히 찼더라고요.”

약속을 지키겠다고 고백하자 기적이 일어났다. 호흡곤란과 극심한 통증이 단번에 사라졌다. 숨이 차서 기다시피 올라왔던 교회 계단을 돌아갈 땐 뛰어서 내려갔다.

제대 후 군대에서 알게 된 목사님 교회를 찾아가 숙식을 해결하며 신학교 입학 준비를 했다. 2년간의 공부 끝에 그는 29세에 칼빈신학교에 입학했고 10년 뒤엔 개혁총회신학대학원(현 총회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소년원 목사에게 가면 기적이 있다

불쌍한 사람을 돕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겠다는 서원대로 그는 신학 공부를 하며 고아원과 소년원 사역을 병행했다. 당시만 해도 고아원은 봉사자를 비롯해 교회의 도움이 많았다. 반면 소년원에 대한 사회의 인식은 싸늘했다. 교회도 소년원에는 도움의 손길을 잘 내밀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소년원과 소년원생이 세상의 ‘땅끝’이자 ‘강도 만난 이웃’이란 확신을 갖게 됐다. 김 목사는 원생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온 마음을 쏟았다. 하지만 소년원 사역에 전념할 생각은 없었다.

그는 이미 서울 강남 지역의 교회에 부교역자로 일하기로 된 상태였다. 그런데 서울소년원에서 충주소년원으로 이송된 재필(가명)이가 면회를 와 달라고 계속해서 3통의 편지를 보냈다. 당시는 한달에 편지 1통 밖에 허용되지 않았다. 3개월 동안 쓸 수 있는 편지 3통을 모두 자신에게 써 보낸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인생 전환은 엉뚱한 곳에서 시작됐다. 재필이의 고민을 보듬고 난 다음 만난 충주소년원장의 한 마디가 그의 가슴에 불을 댕겼다.

“꾸준히 봉사하러 오는 사람들이 거의 없는 걸 보니 원래 목사들은 성실하지 않은 모양이오.”

“그 말을 듣자마자 원장에게 ‘시간 주면 내가 오겠다’고 했지요. 1980년 당시엔 서울서 차를 네 번 갈아타야 충주소년원에 갈 수 있었는데, 청빙 받은 교회는 사양하고 충주소년원을 사역지로 정한 셈이지요. 약속은 지켜야 하니까.”

예정에도 없던 소년원 사역은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전혀 강요하지 않았음에도 200여명의 원생 전원이 예배에 동참했다. 앉을 자리가 부족해 복도에도 담요를 깔았다. 소년원에서는 복음성가를 행군가로 고를 만큼 적극적으로 도왔다.

예상치 못한 사역의 은혜에 감격할 즈음 또 다른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당시만 해도 교정행정 여건이 열악했던 데다 더욱이 의무행정 수준은 외부 진료기관과는 현격한 차이가 있는 시절이었다. 적기에 제대로 된 치료를 받기가 쉽지 않았다. 이런 상태에서 심각한 관절염으로 고생하던 한 원생이 김 목사의 정성어린 기도 덕에 회복된 것이다. 두 달반 동안 자리에 누워있던 원생이 일어나 걸었던 순간을 그는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기도해 주러 가면서 너무 겁이 났습니다. 제가 병을 못 고친다면 사역을 그만둬야 할 것 같았거든요. 소년원을 다시 찾기 무서울 정도로 걱정이 됐지만 자나깨나 아이의 치료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감사할 일은 한번에 그치지 않았다.

84년 당시 배명인 법무부 장관이 전국 소년원장과의 정례 모임에서 종교시설 건립을 승인했다. 따라서 이미 원내 교회가 있던 서울·충주·춘천 이외의 소년원에도 교회가 세워지는 발판이 마련됐다. 춘천소년원장이 모임에서 김 목사의 사역을 긍정적으로 소개해준 것이 계기가 됐다.

“그때 장관님이 원생의 심성이 순화되는 효과가 있다며 전국 소년원에 국내 4대 종교 활동과 1인1신앙을 갖도록 허락했는데 정말 뜻밖의 기적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생각해보면 그때 선교 현장에선 놀라운 일이 자주 일어났습니다.”

나는 디딤돌이다

매일같이 경험하는 은혜와 축복으로 행복했지만 어려운 일도 많았다.

그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형기를 마치고 사회로 복귀한 원생들의 자신에 대한 거부감과 높은 재범 가능성이었다. 결손가정에서 자란 10대들은 범죄의 유혹에 쉽게 빠졌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아버지로서 아들을 믿는 심정이었다. 또 주어진 환경을 극복하는 방법은 이들이 하나님을 만나는 것밖에 없다고 확신했다.

“폭주족으로 살다 서울소년원에 온 녀석이 있었는데 워낙 거칠고 불같은 성격이어서 아무도 통제할 수 없었어요.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그 아이가 신앙수련회에 와서는 고개를 숙이고 계속 울더라고요. 눈물을 너무 흘려 주체할 수 없을 정도였어요. 퇴원 후 배움터에 데려왔는데 의자에 자신을 묶고 앉아 있는 연습을 합디다. 자신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너무 처절했어요.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그냥 두시지 않지요. 신학을 공부하더니 수석 졸업을 했고 지금은 큰 교회의 부목사로 있습니다.”

자신을 넘어선 이들은 목회자 외에도 건축자재 사업가로, 헬스 트레이너 등으로 사회에 자리 잡았다. 명절 때면 아들 몇몇은 그를 찾아온다. 그러나 오지 않는 아들들에 대해 김 목사는 절대 섭섭해하지 않는다. 오히려 안도한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처럼 연락이 없으면 잘살고 있는 것이라고 그는 믿는다.

“제가 하는 일은 디딤돌이라고 생각해요. 저를 밟고 한 단계 도약토록 하는 게 제 사명의 끝이지요. 사회로 나간 뒤 보답할 마음도 갖지 말라고 해요. 보답은 하나님께 받으면 되죠. 뭘.”

모든 기적은 기도에서 시작된다

김 목사는 매번 하나님의 뜻보다, 기도보다 앞서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어도 기도하면 극적으로 이뤄지는 삶을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매년 두 번씩 매회 1500만원이 드는 신앙수련회 비용도, 자원봉사자 지원도 걱정해 본 일이 없다. 소유개념도 사역처럼 모든 걸 내려놨다. 결혼한 지 32년째지만 자신 이름으로 된 집 한 칸 없이 월세 집만 29번 이사했다.

그는 요즘 청소년 예방 사역에 주력하는 기숙형 대안학교를 세우는 일과 소년원 선교에 나설 후임자를 찾는 일이 급선무라고 했다. 비용이 가장 큰 문제지만 걱정하거나 서두르진 않겠다고 했다. 의심이 많은 기자는 그래도 걱정되지 않느냐고 물었다.

“대출을 하면 두 가지 문제가 해결될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렇게 서둘러서 하진 않을 생각입니다. 조급하게 하려다 부도난 선교회나 교회도 많거든요. 나는 항상 하나님께 목숨을 바치는데, 이런 제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해주시지 않겠어요?”

글=양민경 기자·사진=조재현 인턴기자 grie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