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철훈의 현대시 산책 감각의 연금술] (26) 구름위의 산책자… 시인 강정

입력 2012-08-02 18:20


강정(41) 시인의 고향은 부산이다. 초등학교는 부산에서 나왔지만 이사를 많이 다녔다. 중학교는 서울, 고등학교는 부산, 이런 식이다. 그는 다양한 언어 영역에 둘러싸여 성장기를 보냈다. 어머니는 충청도 사람이어서 밖에 나가면 충청도 사투리를 썼지만 가족끼리는 서울 표준말을 썼다.

하지만 강정의 말은 완전한 표준말도 아니었다. 그의 말은 경상도도 충청도도 표준말도 아닌 그만의 독특한 방언에 가깝다. 일부러 다른 지역의 방언으로 말하면서 언어의 질감을 바꿔보곤 하던 그는 친구가 별로 없어 혼자 책 보고 음악 듣는 시간이 많았다. 중학교 때 미국의 싱어송라이터인 짐 모리슨을 좋아했다. 모리슨이 프랑스 시인 랭보를 좋아했다는 얘기를 듣고서 그 이름이 딱 박혀버렸다. 그래서 랭보를 멋모르고 읽기 시작했다. 랭보의 영혼을 담아낸 글자들을 보며 거기서 떠오르는 어떤 분위기와 드러나지 않는 영혼의 표상 같은 것에 빠져들었다. 혼자만 아는 세계가 생긴 것 같았고, 자연스럽게 랭보를 흉내 내서 시를 끼적거리게 됐다.

얼결에 재수하면서부터 철학이나 인류학 같은 걸 전공하고 싶었지만 내신 성적 때문에 추계예술대 문예창작학과에 입학한 그는 2학년 때인 1992년 ‘현대시세계’를 통해 문단에 나왔다. 그러나 스물둘 새파란 시인에게 청탁은 오지 않았다. 군대를 갔다가 제대한 1996년, 그가 첫 시집 ‘처형극장’을 펴냈을 때조차 문단 반응은 냉랭했다. 너무 앞서 나간 것이다.

랭보 탐닉 홀로 아는 세계 정착

詩마다 프랑스 상징주의 필터링

“저들이 산을 넘보는 것에 대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렇게나 부려놓은 짐들을 저들은 개의치 않는다/ 홀연히 가벼워진 어깨와 그 없는 무게의/ 끝없는 진공 속에서/ 거꾸로 자라는 이무기처럼 소리없이/ 등짝에 들러붙는 기억// (중략)// 그러나 내가 무언가? 몸을 걸러내는 수단으로 저들은/ 가장 더러운 형태의 배설을 익혔을 뿐이다/ 가장 훌륭한 짐이더라도 몇 개의 아슬아슬한 구멍들을 피해 뛰면서/ 가장 먼 곳에서 시드는 먼지의 켜가 될 뿐이다”(‘구멍에 대하여’ 부분)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고 했던가. 첫 시집은 “망신을 무릅쓴 진짜배기 탐미주의를 맛보기 위해 한국 문단은 강정의 ‘처형극장’을 기다려야 했다”(고종석) 등의 뒤늦은 호평을 받았다. 지난 6월엔 프랑스 문예지 ‘포에지(PO&SIE)’와 대산문화재단이 프랑스에서 공동 주최한 한국시 낭독회에서 프랑스 측 요청으로 ‘구멍에 대하여’가 낭송되기도 했다. 청중들은 “이미지 사용법이 신선하다” “배가 뒤틀리는 듯 강한 감정이 느껴졌다”는 등 호평을 쏟아냈다. 실제로 강정은 이 시를 포함해 80여 편의 시를 제대 후 복학하기까지 넉 달 동안 한꺼번에 쏟아냈다. 혼자 신이 나서 완전히 세상 꼭대기에서 노는 기분이었다.

당시 그는 굉장한 에너지 덩어리를 느꼈다고 한다. 컴퓨터만 켜면 시가 나왔다. 그러면서 이 순간이 지나면 이런 시를 앞으로 쓸 수 없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의 예감대로 두 번째 시집 ‘들려주려니 말이라 했지만’을 묶은 건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2006년이었다.

“그가 내게 처음 한 말은/ 물이 모자라 거죽이 붉게 부르튼 어느 짐승에 관한 얘기다/ 듣고 보니 말이라 했지만,/ 그 짐승의 존재를 알게 된 건 사람의 입을 통해서가 아니다/ 비이거나 혹은 바람이거나/ 아직도 살 만큼 물이 충분한 내 몸에 파충류의 피륙 같은/ 돌기가 솟았던 걸 보니/ 짐짓 실체가 없는 무슨 진동 같은 거였는지 모른다/ 말이거나 비이거나 바람이거나/ 생각해보니 그것은 내 촉수를 자극해 조금씩 부풀면서/ 존재를 확인하려 하면 사라지고 만다”(‘들려주려니 말이라 했지만’ 부분)

강정의 시에는 프랑스 상징주의가 필터링돼 있다. 그는 랭보나 보들레르처럼 들끓는 아름다움에의 순교를 마다하지 않는 구름 위의 산책자가 되고 싶다.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