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길] 소금, 거기엔 우리의 거친 역사가 숨어있다

입력 2012-08-02 18:20


작지만 큰 한국사, 소금/유승훈/푸른역사

설탕의 역사, 커피의 역사, 홍차의 세계사…. 이른바 작은 것의 역사라고 일컫는 미시사(史)는 최근 수년간 출판계의 유행이었다. 하지만 이를 한국사에 대입한 시도는 없다시피 했다. 여기, 한국판 미시사가 나왔다. ‘작지만 큰 한국사, 소금’이 그것이다. 저자는 낙동강 하구 염전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으니 ‘소금 박사’라고 할 만하다. 또한 소금과 젓갈의 고장인 전북 곰소 출신으로 젓갈 장사로 자식을 키운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기억까지 가졌다. 책은 이처럼 가족사에 연원을 두고 소금에 천착했던 저자가 들려주는 소금의 한국사다.

◇소금은 권력=지금이야 흔해 빠진 게 소금이다. 몸에 해롭다며 외려 멀리한다. 하지만 고대로 올라가면 소금은 철과 함께 국가를 지탱했던 원동력이었다. 소금 염(鹽)자를 풀면 신하(臣)가 소금 결정(鹵)을 그릇(皿)에 두고 지킨다는 뜻이다. 소금은 이렇듯 절대자의 권위와 힘의 상징이었다.

이 책의 1부, ‘짜게 본 역사’도 소금의 역사를 통시대적으로 보면서 정치사에 녹여 넣는다. 우리 역사에서 처음으로 소금을 전매한 왕은 고려 충렬왕이었다. 그는 처음으로 중국 원나라의 사위가 되는 불명예를 안은 고려 왕이다. 쿠데타에 의해 폐위됐던 아버지 원종이 원나라 황제 쿠빌라이에 기대어 복위하면서 권력 유지를 위해 장남인 그를 ‘결혼 제물’로 바쳤던 것이다. 어쨌거나 부친 사후 귀국해 왕위에 오른 그가 권력기반 및 경제기반 강화를 위해 실시한 것이 소금전매제였다. 권문세가들이 소금가마를 탈점해 국가 수입이 감소하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였다. 저자는 충렬왕이 소금 전매 정책 아이디어를 볼모로 잡혀 지냈던 원나라에서 배웠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한다.

◇소금은 복지=소금은 복지 재원이기도 했다. 조선 성군 세종은 즉위 후부터 7년간이나 심한 기근을 겪어야 했다. 오죽했으면 그가 ‘이토록 가무니 정사하기 어렵다’고 토로했겠는가. 굶주린 백성을 위한 복지정책의 재원으로 쓰인 것이 소금이었다. 그 결과 세종 27년(1445년) 일종의 소금 전매 기능을 가진 ‘의염색’이라는 관청이 설치된다.

뛰어난 위정자들도 소금에 관심을 가졌다. “예로부터 나라를 넉넉하게 하고 백성을 구제하는 방책은 바닷물을 구워 소금 만드는 것으로 우선을 삼았으니, 진실로 잘 처리한다면 바다에서 소금을 얻는 것이 무궁합니다.”(104쪽) 임진왜란(1592∼1598년) 후 헐벗은 백성을 보다 못한 명재상 유성룡은 이렇게 소금에 눈을 돌렸다. 그는 소금생산을 장려하고자 염철사(소금 담당 관리) 제도를 도입해 전국에 파견했다.

◇소금은 수탈=소금에는 일제강점기의 비극도 서려 있다. 일제는 한반도를 소금공급기지로 삼기 위해 전통적인 자염 대신에 제조가 쉬운 천일염으로 생산 방식을 개편했다. 하지만 당시 일제가 서북 지역에 천일염전을 집중 건설한 탓에 광복 이후 남한은 혹독한 소금 빈곤을 감내해야 했다. 민족분단만큼이나 고통스런 ‘소금 분단’을 타개하기 위해 한국 정부는 대대적으로 천일염전을 증설했다. 결과는 소금 과잉의 후폭풍이었다.

이처럼 소금에는 영욕의 권력사, 위정자의 애민, 수탈의 역사가 서려 있다. 소금 알갱이는 작지만 역사에 미친 영향력은 결코 작지 않다. 그래서 책 제목도 ‘작지만 큰 한국사’라고 저자는 말한다.

◇소금은 문화=우리는 대개 바람과 햇볕에 의해 생산되는 천일염을 전통적인 소금이라고 알고 있다. 하지만 천일염 이전에 우리 민족의 식생활사와 같이 하던 소금은 자염(煮鹽)이었다. 자(煮)는 끓이다, 삶다의 뜻이다. 가마솥 등에 끓여 소금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런 이유로 옛 기록은 소금을 굽는다고 표현했다.

하지만 자염 생산 방식은 일제가 국책사업으로 추진한 천일염 생산에 밀려 쇠락의 길을 걸었다. 저자는 천일염의 생산지였던 인천 영종도를 지나면서 보다 더 오래된 자염의 역사를 떠올린다. 조선시대 인문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실린 ‘소금 굽는 연기가 가까운 물가에 비쳤다’는 기록을 떠올리면서 말이다.

책 갈피갈피에는 이런 답사기가 끼어 있어 자칫 지루해지기 쉬운 책의 전개에 간간한 소금 역할을 해준다. 전북 곰소만, 충남 태안 소금, 낙동강 하구 염전, 최대 소금 산지인 전남 신안 등이 소개된다. 책의 2부 ‘간을 친 문화’에서도 소금장수 설화, 자염 생산 비법, 짠맛에 대한 명상 등 가벼운 읽을거리를 제공한다.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