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박명권] 대의명분

입력 2012-08-01 18:54

3차 십자군 원정에 나선 영국왕 리처드는 이슬람에 점령된 성지 예루살렘 탈환을 목전에 둔 시점에 고국에 남겨둔 중신으로부터 편지 한 장을 받는다. 동생 존이 프랑스왕과 연합해 반란을 일으켰으니 속히 귀국하라는 내용이었다. 리처드는 고민에 빠진다. 성지 회복이라는 명분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즉시 돌아가 반란을 진압하는 실리를 좇을 것인가.

이때 어린 시절 그를 가르쳤던 노 사제가 눈물로 호소했다. 지금까지 계속 이기게 해주신 신에게 비로소 보답할 기회가 왔는데 여기서 주저하다니. 술탄이든 이슬람 병사든 이집트든 리처드의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떠는 마당에 귀국이라니. 이틀간 고민한 리처드는 결국 예루살렘 진군을 택한다. 전사인 동시에 순례자인 병사들이 환호성을 올린 것은 당연했다.

리처드의 결단에서 볼 수 있는 것 처럼 대의명분은 서양에서도 중요하게 취급됐다. 구원론의 중심 개념인 의인(義認·justification)이나 떳떳하고 정당한 도리(道理)를 지칭하는 의(義·rightousness)개념이 오래 전에 정립됐다고 한다. 동양의 전유물이 아니란 말이다.

검찰 출석을 요구받고 국회로 넘어온 체포동의안을 무력화시키려 했던 민주당 박지원 원내대표의 당초 행보는 분명 명분이 없어 보였다. 의원 불체포특권을 내려놓으라는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돼 있는 마당에 이를 따르지 않으니 여론이 좋을 리가 없었다. 검찰 소환을 피해 얻을 수 있는 이익이 도대체 얼마나 큰 것이기에 출두를 거부했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막판에 자진출두라는 카드를 선택함으로써 명분과 실리를 동시에 챙기는 기지를 발휘한 데서 관록이 묻어 나왔다.

선비의 행동기준이 되는 대의명분이 우리 사회에서 중요한 가치로 떠오르자 기업들도 이를 마케팅에 자주 이용한다. 자기 기업이나 브랜드를 자선이나 대의명분과 연관지어 이익을 도모하는 전략이 바로 그것. 백화점 등에서 판매수익을 소외계층을 위해 사용하겠다거나 연예인이 공연 수익금을 아동학대 방지 캠페인 등에 쓰겠다고 밝히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따지고 보면 지금 한창 민심을 모으기에 분주한 여야의 대선 예비주자들도 기업처럼 대의명분 마케팅에 나선 것에 다름 아니다. 자신이 이끌어갈 이 나라의 청사진을 제시하며 국민들에게 구매를 부탁하는 것 아닌가. 다만 너무 노골적으로 이익을 추구하는 모습을 보일 경우 자칫 불매운동에 직면할 수 있다는 점은 유의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박병권 논설위원 bk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