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 따뜻함
시인 고은 선생님과의 인터뷰는 만만치 않았습니다. 긴장감이 있었습니다. '성공'이 무엇인지에 대해 물었을 때 시인은 퉁명스럽게 말했습니다. "나는 말이에요, 누가 성공을 이야기하면 오싹오싹 소름이 끼쳐요, 소름이……." 죽음에 대해서 대화를 하면서 물었습니다. “수많은 죽음을 목도하셨고, 죽음 근처에도 가셨습니다. 죽음을 넘어선 삶이 가능합니까?” 시인은 갑자기 정색하면서 “아이고, 무슨 말을 그렇게 함부로 합니까?”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한마디 더합니다. "이제 나에게 죽음일랑 묻지 마시오.” 찔끔했습니다. 암튼 인터뷰 상대로서 그는 깐깐했습니다.
그러나 저에게 시인 고은은 너무나도 따스한 분으로 기억됩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긴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갈 때 시인은 집 문밖에 나와 저를 배웅했습니다. 경기도 안성에 있는 시인의 집 앞은 길이 좁아 차를 후진해서 오던 길을 돌아가야 했습니다. 그와 만난 날은 그해 들어 가장 추운 날이었습니다. 노 시인은 제 차가 코너로 돌아 보이지 않을 때까지 한참 동안 문 앞에 서서 손을 흔들고 계셨습니다. 그와 나눈 여러 대화보다도 겨울날, 먼발치에서 끝까지 손을 흔들어 주던 시인 고은의 모습이 오래도록 남았습니다. 지금도 그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시인 고은은 ‘맛있는 삶’을 살고 있는 ‘멋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따뜻한 시인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따뜻한 사람을 좋아합니다. 선인이건, 악인이건, 누구나 따스한 온기를 그리워하니까요. 이 땅을 정말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은 따뜻한 분들입니다. 그들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래서 그들 곁에 머물면 행복해 집니다. 졸저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에 나오는 멘토들의 특징 중의 하나는 그들 모두 따스한 사람들이라는 점입니다.
이해인 수녀님은 참 따뜻했습니다. 오랜 수도원 생활에서 배인 절제가 있었지만 수녀님과 대화를 조금만 나누면 그녀의 따스한 온기에 취하게 됩니다. 수녀님은 매일 신문에 나오는 뉴스를 보고 기도의 제목을 찾습니다. 아픔을 당한 사람들의 소식을 접하면 그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리고 직접 추모 사이트에 들어가 글을 남기거나 현장을 찾기도 합니다. 타인의 슬픔을 나의 슬픔으로 체화하는 것, 따스함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방랑식객》임지호 선생도 따뜻한 분이었습니다. 그가 음식을 만드는 이유는 남을 대접하기 위함입니다. 이 땅의 민초들은 일찍부터 집 떠난 그가 굶어죽을 위기에 처할 때마다 음식을 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 고마운 분들의 은혜를 갚는 길은 자신 또한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맛난 음식을 대접하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따스한 사람들을 만나 그의 생명이 보존되었습니다. 세월이 지나도 그들을 잊지 않고 보답합니다. 따뜻함의 선순환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음식을 해 주는 자리에 서 있다는 것이야말로 인생에서 가장 수지맞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남을 대접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나 밖의 나’에게 공양을 하는 것이지요. 이 대자연 속에서 나와 남은 하나입니다.”
이분들 뿐 만이 아닙니다. 생각해보니 소설 《빙점》을 쓴 미우라 아야코의 남편 미우라 미쓰요씨를 비롯해 서영은 김남조 하종강 정진홍 이철환 선생님 등 모두가 따뜻한 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저의 마음 깊이 남아 있습니다. 가슴이 시릴 때마다 그들을 생각하면 따뜻해집니다.
우리가 타인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따뜻함인 것 같습니다. 이 글을 쓰면서 저는 스스로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이태형, 너는 따뜻한 사람이니?" 안도현 시인의 표현을 패러디하면 "너는 한번이나 따뜻했던가?"입니다. 여러분은 따뜻하십니까?
글ㆍ이태형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 저자, 《국민일보》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