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人터뷰] 상고 출신 ‘소신파’ 김동연 기획재정부 2차관

입력 2012-07-31 16:15


“영유아는 가정양육이 바람직… 보육체계 대수술해야”

흔히 공무원은 영혼이 없다고 한다. 정권이 바뀌는 대로 나라를 이끌어가는 최고 수장의 입맛을 맞춰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15년 넘게 경제부처를 출입하면서 ‘노(NO)’라고 청와대와 각을 세우거나 국회나 언론으로부터 욕을 먹더라도 옳다고 믿는 정책을 소신 있게 밀어붙이는 공무원들을 간혹 봤다. 김동연(55) 기획재정부 2차관도 그런 공직자 중 한 명이다.

2010년 예산실장 당시 처음 만난 김 차관은 먼지 풀풀 나는 교과서 속에나 처박혀 있는 줄 알았던 ‘애국심’이란 단어를 떠올리게 한 사람이다. 상고 출신 차관이어서 그런지 우리 사회의 음지를 바라보는 눈이 누구보다 따뜻했고, 어려운 이들을 위해 희망사다리를 만들어주고 싶은 열정이 강했다.

지난 총선 때는 복지 태스크포스(TF)를 만들어 각 당의 공약에 대한 재정 소요를 발표하더니 최근엔 “재벌가 손자까지 정부가 보육비를 대주는 것은 문제 있다”며 0∼2세 영유아 전면 무상보육에 딴지를 걸었다. 나라곳간을 책임지는 2차관으로서 재정을 고려해 복지 분야 예산을 배정하는 게 당연한 임무지만 대선을 앞둔 정치권 입장에서 보면 곳간 열쇠를 콱 움켜쥐고 있는 시어머니다. 올가을에는 복지예산을 놓고 정치권과 더 힘겨운 싸움을 할 것으로 보이는 김 차관을 지난 26일 정부과천청사에서 만났다.

-최근 0∼2세 무상보육체계 개선과 관련해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정부는 선별 지원으로 방향을 틀려 하는 것 같은데 정치권의 반발이 심하다. 어떤 방향으로 논의되고 있나.

“이 문제는 돈 문제에 앞서서 보육정책을 어떻게 끌고 갈 것인가 하는 점에서 중요하다. 0∼2세의 경우 많은 전문가들이 가정 양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현행 지원체계의 문제점을 제기하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도 가정 양육을 권고하고 있다. 그런데 보육료를 100% 지원하다 보니 ‘보육시설에 보내지 않으면 손해’라는 생각으로 모든 영유아를 시설에 보내는 일이 벌어졌다. 따라서 보육시설에 보낼 것인지, 가정양육으로 바꿀 것인지 현행 지원제도를 지속하는 것을 포함해 보육지원체계를 재구조화하는 방향에 대해 검토하고 있다.”

-서초구를 비롯한 일부 지방자치단체에서 재정 부족으로 무상보육을 중단할 수밖에 없다며 반발하고 있다. 지자체들은 국비 100% 지원을 요구하고 있는데.

“현 정부 출범 당시 1조4000억원이었던 중앙정부 보육예산이 올해 3조원까지 확대됐다. 다만 보육은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가 함께 책임을 져야 하는 사안이다. 지자체들의 애로사항도 충분히 인식하고 있는 만큼 중앙정부와 지자체 간 재정분담 원칙과 지자체들의 재정상황 등을 감안해 다각적인 방안을 검토 중이다.”

-박근혜, 손학규 등 대선 예비후보들은 벌써부터 고교 무상교육까지 거론하고 있다. 선거를 앞두고 복지 포퓰리즘이 만연할 것 같은데 어느 단계까지 수용하고 어느 선에서 막아낼 것인지.

“우리나라가 복지국가를 지향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문제는 어떤 복지철학으로 어떤 복지국가를 만들어 나가느냐다. 국민의정부 때는 공공부조와 사회보험의 틀을 만들었고, 참여정부 때는 복지에 사회투자 개념을 도입해 사회서비스를 대폭 확충했다. 현 정부는 일하는 복지와 맞춤형 복지를 기본 방향으로 하고 있다. 포퓰리즘적 복지가 아니라 바람직한 복지 비전을 세운 후에 구체적인 복지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복지를 담는 그릇으로서 경제 비전과 재정의 지속가능성 문제를 고려해야 한다. 복지를 더 담기 위해 5년, 10년 후를 생각하며 미래 먹거리를 확충하는 것이 중요하고, 봇물 터지듯 늘어나는 복지 수요에 대해 우리 재정이 어느 정도 감당할 수 있을지를 면밀히 따져서 중장기적인 계획을 세울 필요가 있다.”

-4월 총선 전 복지TF에서 정치권 복지공약을 이행하려면 5년간 최소 268조원이 소요된다고 발표했다. 이번 대선공약도 재정 소요 등에 대해 검증할 것인지.

“복지TF를 만든 것은 정치권에서 거론되는 공약에 대해 재정 소요를 검토하는 것뿐만 아니라 새로이 도입된 대형 신규 복지 프로젝트가 제대로 착근될 수 있도록 점검·보완하고 복지 사각지대 해소, 새로운 복지프로그램 개발 목적도 있다. 정치권 공약에 대해 재정 소요 등을 검토하는 것은 재정당국이 해야 할 당연한 책무다. 다만 선거관리위원회에서 지적한 것에 유념해 선거에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하겠다.”

-유럽 재정위기가 심상치 않다. 지난주에는 우리나라 2분기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이 1분기 대비 0.4% 증가에 그쳤다는 우울한 뉴스도 전해졌다. 정치권에선 추경 예산 편성 요구도 나오는데.

“현재 경기 상황은 적이 침입을 하는데 적을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는 상황이다. 적이 사정권내 들어왔을 때 사격을 해야 한다. 안 들어올 때 사격하면 실탄만 낭비한다. 또 총을 쏘면 반드시 적을 물리쳐야 한다. 총을 쐈는데 명중을 못 시키면 실탄이 한정돼 있기 때문에 상황이 더 어려워질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추경은 신중히 고려해야 한다. 다만 지난주 발표된 2분기 성장률 등에 유념하고 있고 앞으로의 경제 상황을 면밀히 모니터링해 만약 2008년처럼 경제가 급격히 어려워져 재정의 적극적 역할이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정부는 과감하게 확대 재정정책을 펼 것이다.”

-하반기 경제정책 방향을 발표하면서 각종 기금 증액 등을 통해 8조5000억원을 푼다고 했다. 세계 각국이 양적완화와 기준금리 인하 등을 통해 적극적으로 경기부양에 나서고 있는데 우리는 대통령이 지난해 8·15 경축사에서 공언한 내년 균형재정 방침에 너무 집착해 돈을 안 푸는 것 아닌가.

“균형재정 도그마에 빠졌다는 말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균형재정은 경제정책 운용의 수단이지 목표 가치는 아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청와대 경제금융비서관으로 있으면서 과감한 확대 재정정책에 앞장선 적이 있다. 지금은 적의 병력이 국경을 넘어오려고 하는데 그 뒤에 많은 적이 있을 수도 있다. 다시 말하면 경제위기가 장기화, 상시화될 것에 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적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충분하고 집중적으로 총을 쏴야 하는데 한번 쓰게 되면 실탄을 다시 채우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앞으로 올 수 있는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 재정건전성을 크게 해치지 않는 수준에서 최대한 노력하고 있다. 경제상황이 좋지 않기 때문에 돈을 쓰자는 주장은 더욱 강해질 것이다. 평시에는 예산을 주지 않는다고 욕을 먹고, 위기 시에는 빚을 내서라도 돈을 풀어야 한다는 비판을 받는 게 재정당국의 숙명이다.”

-‘고졸 신화’의 주인공이 되기까지 인생역정을 들려 달라. 그리고 요즘 젊은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열한 살에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가세가 기울어 청계천 무허가 판잣집에서 살았다. 이후 그 집이 철거돼 지금의 성남시로 강제 이주해 천막을 치고 살면서 고등학교를 마쳤다. 할머니, 어머니, 세 동생을 부양해야 했기에 덕수상고를 졸업하기 전 은행에 취직해 야간 대학(국제대)을 다녔다. 은행 합숙소에서 옆방 선배가 쓰레기통에 버린 고시 관련 잡지를 보고 고시 공부를 시작해 입법고시와 행정고시에 합격했다. 세상을 원망하거나 절망한 적도 있지만 나를 지탱해준 것은 분수에 맞지 않게 가졌던 꿈과 열심, 낙관적 마음자세였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어려웠던 시절은 지금의 나를 만든 ‘위장된 축복’이었다. 젊은이들에게는 주어진 도전을 피하지 말고 정면 돌파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 도전을 만들어 부딪쳐 보라고 권하고 싶다. 또한 목표를 갖고 그것을 달성하는 것 못지 않게,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을 즐기라고 얘기하고 싶다.”

그는 얼마 전 강원도 깡촌의 학생수 21명인 중학교를 다녀왔다. 가정형편이 너무 어려워 절망 속에 있는 아이들에게 용기를 달라는 교사의 편지를 받고서였다. 21명의 학생들에게 각각 다른 책 21권을 사주면서 다시 한번 어려운 학생들의 진학과 취업을 지원하는 ‘교육 희망사다리’ 사업을 역점적으로 추진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현장을 발로 뛰는 김 차관 같은 가슴 따뜻한 공무원들이 있는 한 우리 사회는 아직 희망이 있다.

이명희 논설위원 mhee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