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이명희] 조세피난처
입력 2012-07-31 19:23
예나 지금이나 세금 고지서는 반갑지 않은 불청객이다.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세금을 아예 내지 않거나 조금만 내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다. 이렇게 해서 생겨난 것이 조세피난처(Tax Haven)다. 조세피난처는 세금이 면제되거나 아주 낮은 세율로 부과되는 국가나 지역을 의미한다.
고대 그리스 시대의 일부 섬들은 해상 무역상들에 의해 물품 창고로 이용됐다. 무역상들은 아테네 등 도시국가들이 수입품에 대해 부과하는 2% 세금을 피하기 위해 물품을 섬에 보관했다. 조세피난처의 원조다. 현대적 개념의 첫 조세피난처는 1차 세계대전 이후 1935년 처음으로 해외기업 관련 법을 만든 버뮤다라는 주장이 통용되지만 1926년 해외자본을 끌어들이기 위해 신탁법을 만든 유럽의 리히텐슈타인이라는 반론도 있다.
진정한 의미의 첫 조세피난처는 스위스다. 스위스는 오랫동안 러시아, 독일, 남아메리카 등의 사회적 폭동으로 도망치는 사람들을 위한 자본 피난처였다. 1차 대전 이후 많은 유럽 국가들이 전쟁의 폐허를 복구하기 위해 세금을 왕창 올렸지만 영세중립국으로 전쟁피해를 입지 않은 스위스는 낮은 세율을 유지했다. 이로 인해 세금폭탄을 피하려는 외국자본이 밀려들어왔고, 스위스 은행들은 고객의 인적사항 등을 비밀에 부쳐주면서 검은 돈의 온상이 됐다.
얼마 전 영국의 시민단체인 조세정의 네트워크는 1970년대부터 2010년까지 우리나라에서 외국의 조세피난처로 이전한 자산이 888조원에 달한다고 밝혔다. 중국, 러시아에 이어 세계 3위의 오명을 안았다. 전 재산이 29만원이라며 추징금을 안 내고 버티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나 비자금을 놓고 송사를 벌이는 노태우 전 대통령, 재벌들의 비자금들이 합쳐진 금액일 거다. ‘유리지갑’ 월급쟁이들은 꼬박꼬박 세금 내는데 부자들은 세금을 안 내기 위해 대서양 외딴 섬에까지 돈을 숨겨놓으니 억장이 무너질 일이다.
하지만 요즘 샐러리맨들의 울화병을 식혀줄 시원한 소식이 전해지고 있다. 한·스위스 조세조약개정안이 지난달 25일 발효돼 국내 개인이나 기업의 스위스 금융계좌 정보를 세무당국이 들여다볼 수 있게 됐다. 며칠 전 조세피난처 중의 하나인 카리브해의 케이맨 군도는 재정난을 타개하기 위해 처음으로 외국인에게 과세하겠다고 밝혔다. 부유층들의 검은 돈은 버뮤다나 버진 아일랜드 등 다른 조세피난처로 옮겨가겠지만 그래도 검은 돈이 설 땅이 점점 줄어드는 것 같아 배가 덜 아프다.
이명희 논설위원 mhee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