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박정태] 고위 법조인의 마비된 의식

입력 2012-07-30 18:35


예전에 집을 살 때였다. 매도자가 실제 거래가격보다 낮춘 다운계약서를 쓰자고 했다. 대신 집값을 깎아주겠다는 것이었다. 솔깃한 제안이었다. 매도자는 양도소득세를 줄이자는 생각이었을 것이고 나로서도 매수가격이 낮아지고 취득세도 절감되니 뿌리칠 이유가 없었다. 잠시 고민을 했다. 그러다 제안을 거절했다. 양심상 꺼림칙했고, 기자로서 세금을 탈루하는 범법을 저지르고 어떻게 탈세자들에 대한 비판적 기사와 칼럼을 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지금 보면 바보 같은 행위였다. 다운계약서는 ‘사회의 상식’이었다. 본보기가 돼야 할 고위 공직자들은 대개 다운계약서를 썼다. 위장전입은 필수였다. 이젠 장관 등은 물론이고 사법정의의 최후 보루인 대법관의 ‘자격 조건’에서도 위장전입과 다운계약서가 빠지지 않을 정도니 그건 ‘생활의 지혜’임에 틀림없다.

대법원은 ‘위장전입 클럽’

세상이 거꾸로 가고 있다. 위장전입으로 김대중·노무현 정부에서는 공직 후보자들이 줄줄이 물러났는데 이명박 정부 들어서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현 정부에서 임명됐던 국무총리와 장관급 인사, 법무부 장관, 검찰총장, 국세청장, 경찰청장 등에 이르기까지 상당수가 위장전입이나 다운계약서에도 불구하고 낙마한 적이 없다(수차례 위장전입을 했던 대통령은 선출직이니 그렇다 치자). 특히 대법원은 ‘위장전입 클럽’이란다.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양창수 민일영 이인복 박병대 대법관이 아파트 분양 등을 위해 위장전입을 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상훈 대법관은 다운계약서 작성 사실을 인정했다.

이 정권에서 위장전입과 다운계약서는 ‘사소한 하자’로 치부됐다. 그러니 사과만 하면 청문회에서 통과될 것이라는 인식이 팽배해 있다. 이번 ‘김병화 사태’도 위장전입, 다운계약서 불감증에 걸려 안일하게 생각하다 벌어진 일이 아니고 무엇이랴. 그럼에도 청문회에서 흔한 일이었고, 경제적 혜택도 없었던 데다 관행이었으니까 넘어가달라고 한다. 하지만 그건 아니다. 위장전입은 서민들은 생각할 수 없는 지능형 범죄다. 다운계약서는 세금 탈루로 연결된다. 그것만으로도 불법과 탈법을 저지른 ‘범죄자’다. 그러고도 정의를 바로 세워야 할 대법관 자리에 오르겠다는 건 염치없는 일이다.

그런 후보자를 임명 제청한 양승태 대법원장에게도 유감이지만 그를 추천한 권재진 법무부 장관의 인식은 더욱 문제다. 그 정도 하자라면 대법관 후보로 크게 손색이 없다고 두둔한다. 결정적 하자가 아니란다. 그럼 어떤 게 결정적 하자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살인? 강도? 강간? 차한성 법원행정처장의 국회 답변도 가관이다. “(위장전입 및 다운계약서에 대해) 파악하고 있었지만 그 정도는 이해되는 사안으로 판단했다.” 이는 국민을 우롱하는 것밖에 안 된다. 법무행정 수장과 사법행정 감독자의 법의식과 윤리의식이 마비됐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그러고는 국민의 눈이 높아졌다나 뭐라나. 시대정신에 역행하는 것은 물론 국민의 상식 수준에도 못 미치는 발언이다.

김병화 사태, 장관 책임져야

이를 계기로 후보자 검증 강화 등 인사추천 시스템 전반에 대한 개선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있지만 이번 사태는 검증 이전에 인식의 문제다. 아무리 검증을 잘해봤자 그들만의 리그에서 또다시 “그 정도 하자쯤이야”라고 한다면 시스템도 무용지물이 된다. 스스로 법치주의의 근본을 훼손하고 사법 불신을 초래하는 상황에선 보편적 상식이 끼어들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이번 사태에 대해 법무부 장관과 대법원장은 상응한 책임을 져야 한다. 어영부영 넘어가려 한다면 검찰과 법원은 앞으로 ‘법치(法治)’를 논할 자격도, 국민에게 법 준수를 요구할 자격도 없다.

박정태 문화생활부장 jt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