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많던 시절에 교문을 나서/ 돌격대로 달려왔다네/ 말해다오 기타야/ 누가, 누가 옳았나/ 아이참 돌격대는 청춘의 대학….”
북한 청년들이 즐겨 부르던 ‘돌격대의 노래’다. 돌격대는 군인은 아니지만 그 이상으로 엄격한 단체생활을 했다. 새벽 5시에 기상해 합숙소 주변을 뛰었다. 또 집단체조와 세수를 하고 아침 식사를 한 뒤 현장에 갔다. 현장은 1시간이나 걸어야 했다. 하루 종일 산을 깎아내고 철길을 닦는 일을 7개월간 했다.
가끔 암반을 제거하기 위해 발파작업을 했는데 사고가 속출했다. 손목이 잘린 사람, 타박상을 입은 사람, 장이 파열된 사람이 줄을 이었다. 수많은 18∼19세 소년들과 20대 청년들이 이 건설 현장을 거쳤고 사고를 당해 평생을 장애인으로 사는 어려움에 처했다.
돌을 삼켜도 소화시킬 나이인 청년들은 무엇보다 배고픔이 가장 큰 고통이었다. 그래서 배식시간에는 늘 음식량 때문에 다툼이 있었다. 밖에 나갔다가 식사시간을 지키지 못하면 그나마 굶어야 했다. 한번은 농장 벼를 훔친 것 때문에 몇 사람이 감옥에 가기도 했다. 서로 자기가 책임지겠다고 하면서 친구의 잘못을 자기 잘못으로 돌리며 감옥행을 자처하는 청년 돌격대원들의 얼굴엔 비장함마저 흘렀다.
한 방에 15명이 숙식하는 처녀 돌격대원들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하루는 새벽 1시쯤, 갑자기 다들 일어나라는 소리가 났다. 나이 많은 언니들이 인근 집에 몰래 들어가 김치를 훔쳐왔다는 것이다. 모두 일어나 배추김치를 찢어 먹었다. 오랜만에 맛을 본 김치라 그런지 밥 없이 먹었지만 정말 꿀맛이었다. 예쁜 처녀들은 이렇게 야인으로 변하고 있었다.
추운 겨울날 바깥에서 일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손발이 시리고 성에를 하얗게 뒤짐어써 산타 모양을 한 우리들은 귀가 얼고 때로는 볼이 얼어 시퍼렇게 멍이 들기도 했다. 발에 동상을 입어 진물이 흐르는 사람이 많았다.
우리는 큰 바위를 등짐으로 날랐다. 또 흙을 옮겨 철길을 놨다. 이 철길이 북한이 자랑하는, 동서를 연결하는 북부 내륙선 철길이다. 공사는 7년이나 계속됐다.
돌격대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속절없이 깨진 러브스토리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친하게 지낸 영숙 언니가 대표적인 사례다.
영숙 언니는 입당을 하기 위해 돌격대에 왔었다. 돌격대에서 5년이나 생활했는데 홍만덕이라는 청년을 사랑하게 됐다. 홍만덕은 훤칠한 키에 얼굴도 미남인데다 인간성도 좋아 많은 처녀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영숙 언니는 키도 작고 얼굴도 그리 예쁘지 않았다. 하지만 붓글씨와 그림 그리는 솜씨가 좋았고 특히 아버지가 당 간부여서 출신성분이 좋은 집안의 딸이었다. 두 사람의 사랑은 깊어만 갔다. 결혼도 약속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홍만덕의 아버지 출신성분이 문제였다. 홍만덕의 아버지는 남한 출신이었고 무슨 일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당에서 출당을 당한 사람이었다.
영숙 언니는 이미 임신 6개월째 접어들고 있었다. 집안의 반대로 낙태수술을 받았다. 하지만 영숙 언니는 헤어질 수 없다면서 두 번째 임신을 했다. 하지만 그들의 사랑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영숙 언니의 부모는 두 사람을 갈라놓기 위해 강제로 끌고 가 낙태수술을 또 받게 했다. 그리고 홍만덕을 다른 직장으로 보냈다. 또 그를 직장에서 내쫓고 가족을 산골로 추방하겠다고 위협했다. 결국 두 사람은 아픈 상처만 남긴 채 갈라서게 됐다.
돌격대에는 혁명화를 하러 온 사람도 있었다. 혁명화란 과오가 있는 간부를 농촌이나 오지 탄광 등으로 보내 생산 현장에서 반성하도록 하는 처벌이다. 춥고 배고프고 힘든 토목 공사를 하는 노동이 사람들의 인성을 변화시킨다고 믿는 북한식 전인교육 방법이다. 정말 돌격대의 노래 가사처럼 돌격대는 청춘의 대학이었다. 또 혁명화의 용광로이기도 하고 공산주의 학교이기도 했다.
정리=유영대 기자 ydyoo@kmib.co.kr
[역경의 열매] 이애란 (16) 생사넘는 돌격대 노동… 그리고 슬픈 러브스토리들
입력 2012-07-30 17: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