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 인문학] 종교의 자유와 관용을 설파한 철학자 존 로크 (上)

입력 2012-07-30 21:12


개인의 생명-자유-재산권 주장… 인권과 시민권, 이론적 초석 놓다

“모두가 정통 신앙을 (각자에게는 자신의 신앙이 정통일 것이므로) 제아무리 크게 자랑하더라도 그들이 내세우는 이러저러한 주장들은 그리스도가 세운 교회의 표식이 아니라 인간이 권력과 지배를 둘러싸고 경쟁함을 보여주는 것일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누군가 소유하고 있어도, 만약 자비와 온순과 호의를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는커녕 같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에게조차 결여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아직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로크의 <관용론>)

로크는 ‘관용에 관한 편지’의 첫머리를 이렇게 썼다. 이 편지에서 그는 영국의 혼란한 정치적 상황이 정부와 종교인들의 종교적 편협함에 원인이 있다고 보고 이에 대해 질타하고 있다. 이 편지를 쓸 때 그는 반역죄로 네덜란드에 망명 중이었다. 그가 지은 죄는 반란과 국왕 암살 음모 사건과 연루된 것이었다.

1683년 6월 21일 찰스 2세는 자신과 자신의 동생이자 왕위 계승자인 제임스에 대한 암살 혐의로 급진파 휘그당원들에 대한 체포 명령을 내렸다. 이미 급진파 휘그당원들의 지도자 새프츠베리 백작은 반란죄로 기소되기 전에 네덜란드로 도주했다. 새프츠베리의 측근인 존 로크도 체포 명령이 내려지기 전에 런던을 황급하게 떠나야 했다. 그는 두 달간 웨스트 컨트리에서 머물다가 돈을 마련해 네덜란드로 떠났다. 로크가 네덜란드로 망명을 하자 1684년 찰스 2세는 크라이스트처치가 그에게 주던 장학금을 중단시켜 버렸다. 다음해 영국 정부는 유럽에 지명 수배한 84명의 반역자 명단에 로크의 이름을 올렸다.

존 로크는 영국 근대 경험론의 아버지처럼 불린다. 그는 개인의 생명, 자유 그리고 재산권 등을 주장해 인권과 시민권의 이론적 정초자로 불린다. 그런 그가 어떤 연유로 영국 국왕과 왕위 계승자에 대한 암살 음모에 휩쓸린 것일까.

일의 발단은 왕의 동생이자 왕위계승자인 요크 공 제임스가 ‘심사법(Test Act)’에 따라 선서하기를 거부한 데서 비롯했다. 찰스 2세는 태양왕이라고 불린 프랑스의 루이 14세와 비밀 조약을 맺어 때가 되면 가톨릭으로 개종할 것과 영국 전체를 함께 개종시킬 것을 약속하였다. 실제로 1672년에 그는 ‘신앙 자유령’을 반포해 가톨릭과 비국교회 신교도들에게 관용을 허락했다. 이 덕분에 ‘천로역정’의 저자 존 버니언이 감옥에서 풀려나기도 했다.

그러나 1673년에 찰스 2세가 루이 14세와 맺은 비밀조약의 내용이 폭로되자 찰스 2세는 ‘신앙 자유령’을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 왕을 믿지 못한 의회는 1673년 ‘심사법’을 제정하여 정부 관직과 군대 지휘관직을 맡는 사람은 국교도여야 함을 명시했다. 그러자 요크 공 제임스는 해군 총사령관 자리에서 사임했다. 자신이 가톨릭교도임을 드러낸 것이었다. 영국 의회는 그의 태도에 분노했다. 의회는 영국의 국왕이 영국 국교회의 수장이므로 국교도가 아닌 사람은 왕위를 계승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 주장은 가톨릭교도인 제임스를 왕위에서 배제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1679년 찰스 2세는 의회를 해산하고 새로운 선거를 실시하였다. 이 선거에서 왕에게 충성하는 궁정당을 누르고 가톨릭교도인 제임스를 왕위에서 배제하는 정책을 지지하는 국가당이 절대 다수로 승리했다. 선거에서 국민은 국왕에 대항해 반가톨릭 정서를 드러냈다. 국민은 로마 가톨릭교의 회복을 전제 정치의 귀환으로 생각했다. 새롭게 구성된 의회에서 가톨릭교도의 왕위 계승 배제 법안을 토의하기 시작하자 찰스 2세는 법이 통과되기 전에 의회를 해산했다.

이 새로운 선거에서 휘그와 토리라는 용어가 쓰이기 시작했다. 원래 ‘휘그’와 ‘토리’라는 말은 제임스의 왕위 계승을 두고 의회 내 찬성파와 반대파 간에 주고받은 경멸적인 말이었다. 휘그는 스코틀랜드 게일어에서 유래한 ‘말 도둑’이란 단어였다. 이 말은 비국교도, 반란 등을 내포하기도 해서 왕위계승권 배제파에게 비하조로 사용되었다. 토리는 아일랜드어의 ‘산적’이란 뜻으로 불법적인 가톨릭교도를 뜻했다. 가톨릭교도인 제임스의 왕위계승권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비하조로 그렇게 불렀다. 토리는 제임스의 왕위 계승을 지지하지만, 그들은 국교회 신봉자들이었고, 가톨릭을 지지하지 않았다.

가톨릭 교도인 동생을 국왕으로 삼고자 하는 찰스 2세에 대해 휘그당들이 문제를 제기했다. 휘그당의 지도자가 새프츠베리였다. 그는 영국사에서 최초로 휘그당이라는 정당을 만든 사람이었다. 그는 보수주의적 토리당에 반대해 왕권의 제한과 개신교적 자유 교회의 권리를 옹호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로크는 새프츠베리의 주치의이자 최측근이었다. 그는 간 종양제거수술을 통해 새프츠베리의 목숨을 구해 주었다. 새프츠베리는 그런 로크를 국가 서기관으로 추천해 영국의 정치현실에 참여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로크는 정치적 후견자이자 든든한 지원자인 새프츠베리를 도와 휘그당들의 견해를 이론화했고 그에 대해 철학적인 기초를 제공하였다.

로크는 권력은 사회적 행복과 만인의 평화를 위한 목적을 지닌 것으로 왕에게 독점적으로 부여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다. 또한 의회를 자의적으로 무력화할 수 있는 월권을 행사하는 가톨릭 왕은 공공의 평화를 파괴하고, 아마도 더 나아가 내전을 불러 올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이유로 그는 왕은 정당성을 결여했다고 주장했다.

토리당 쪽에서도 가만있지 않았다. 그들 중의 한 사람인 존 필머(John Filmer)는 1680년 자신의 책 ‘족장론(Patriarcha)’을 발간했다. 그 속에서 왕권은 구약성서에서 하나님이 아담에게 주었던 부계적 권력에서 그 정당성을 찾을 수 있다는 점을 증명하려 하였다. 그에 따르면 정치권력은 ‘가부장제’에 그 뿌리가 있다. 정치권력은 하나님의 선물이요 그것의 권한은 무제한이다. 아담은 정치권력을 그의 후손에게 넘겨주었다. 군주들은 바로 그들에게 속한다. 국가는 왕이 정점에 있는, 가족보다 더 커다란 조직형태이다. 국가의 신하는 가족의 구성원이 아버지에게 하듯이 왕에게 충성을 해야 한다. 필머의 저서는 토리당원들 사이에서 아주 높은 대중적 인기를 끌며 휘그당원들에 맞서는 이론적 무기로 사용되었다.

존 로크는 필머의 이론을 반박하기 위해 ‘통치론’ 1부를 집필한다. 이 책은 필머에 대한 비판뿐만 아니라 혁명의 정당화도 포함하고 있다. 그것은 정당하지 못한 왕권의 전복에 대한 철학적 근거를 제시하는 것이었다.

왕권 전복은 1682년 9월에 새프츠베리와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 실제적으로 계획되었다. 새프츠베리는 찰스 2세가 병이 들어 자리에 눕자, 왕이 죽은 뒤 의회를 설득해 제임스가 왕위계승을 하지 못하게 할 것을 논의했다. 그러나 왕은 회복됐고 그러한 일은 허사가 됐다.

1682년 7월 런던의 치안 판사 선거에서 압도적으로 다수의 토리당 사람들이 뽑혔다. 새프츠베리는 불리한 정세를 간파하고 런던 이외의 잉글랜드 곳곳에서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 그는 즉각적 무장 봉기를 주장했지만 거사를 함께 계획한 사람들의 우유부단함 때문에 무장 봉기는 몇 차례나 연기됐다. 그는 무장 봉기 대신 찰스 2세와 제임스를 암살하려는 음모를 계획했다. 그렇게 해서 가톨릭교도가 왕이 되는 것을 막고자 했다. 그러나 이마저도 발각돼 실패하고 말았다.

새프츠베리는 개신교 목사로 위장하고 네덜란드로 도주해야만 했다. 몇 달 뒤 그는 그곳에서 사망했다. 새프츠베리가 죽고, 영국에서는 1685년에 가톨릭교도인 제임스 2세가 즉위했다. 즉위 후 그는 가톨릭을 부활하고 전제정치를 강화하였다. 국민들과 그를 지지했던 토리당들도 제임스에게서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네덜란드로 망명한 로크는 그곳에서 조용히 혁명의 이론을 다듬고 있었다.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