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김경집] 위와 아래, 그리고 허리

입력 2012-07-29 21:02


어떤 조직이건 중간이 부실하면 위험하다. 그것은 스포츠에서도 마찬가지다. 현대 축구에서는 허리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 아무리 뛰어난 스트라이커라고 하더라도 미드필더의 도움이 없으면 고립무원일 수밖에 없다. 사회도 그렇다. 중간계층, 즉 중산층이 얼마나 탄탄하고 도덕적이냐에 따라 흥망이 갈린다.

당연히 국가도 마찬가지다. 물론 지도자의 자질이 중요하다. 천박한 지도자와 인격적인 지도자에 따라 중간계층을 망하게도 흥하게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는 바로 이 중간계층의 붕괴다.

더 두려워해야 할 문제는 미래 중간계층의 붕괴이다. 바로 청소년 문제다. 학원폭력은 더 이상 낯선 말이 아니다. 심지어 죽음으로까지 몰고 갈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데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이항구조로만 분석하고 대안을 마련한다.

하지만 문제가 해결될 기미는 거의 없어 보인다. 핵심은 가해자와 피해자가 아니라 대다수의 중간자 혹은 방관자이기 때문이다. 가해학생은 왜 누군가를 ‘찍어’ 못살게 굴까? 자기를 돋보이게 하려는 까닭이다. 그래야 인정받는다고 여긴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그 주범은 어른들이다. 어른들의 사회가 그러니 저절로 보고 배우기 때문이다. 비슷한 수준의 아이들을 건드리는 건 위험부담이 높으니 가장 약한 학생을 골라 괴롭힌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그것을 보고 속으로 분개한다. 시달리고 있는 친구를 안쓰러워한다. 그렇다고 나서고 싶지는 않다. 그래봐야 돌아오는 건 불이익뿐인 것을 잘 안다. 어른들의 사회가 그 교과서 아닌가! 그냥 침묵한다. 침묵의 과정에서 자기는 가해자가 아니라며 도덕적 정당성을 마련한다.

그러나 그 침묵은 오래 가지 않는다. 그 폭력이 언제 자기에게 닥칠지 모르기 때문이다. 피해를 당하지 않으려면 가담은 하지 않아도 폭력적 상황을 동의하거나 용인해야 한다. 그 상황이 되면 피해자에 대한 불쌍함이나 미안함은 사라지고 그렇게 당해도 싸다며 근거를 찾아낸다. 오직 자신의 변심에 대한 정당화만 마련할 뿐이다.

그렇게 교실에서 중간계층은 무너진다. 그게 학교폭력의 가장 심각한 문제다. 그들이 앞으로 사회의 건강한 중산층으로 성장할 수 있을까? 두렵고 무섭다. 이런 시각으로 학교폭력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

고대 그리스의 개혁정치인 솔론은 “피해를 입지 않은 사람이 피해를 입은 사람과 똑같이 분노할 때 정의가 실현된다”고 외쳤다. 건강한 중간계층은 방관하지 않는다. 동시에 겉으로 또는 명목상으로만 중립을 지키며 속으로는 자신의 이익만 탐하지도 않는다. 15년 넘게 이어져온 경제위기 때문에만 중산층이 무너지는 것이 아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도덕적으로, 인격적으로 타락했다는 반성적 자기선언이 절실하게 필요한 시점이다.

무관심을 중립으로 분칠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 거짓된 정당화가 중간계층을 붕괴시킨 암적 요인이다. 학교에서 일어나는 폭력은 그 용종(폴립)이다. 그런 시각으로 학교폭력을 봐야 한다. 위아래 가리지 않고 중간이 무너지고 있다. 그걸 두려워해야 한다.

양의 탈을 쓴 늑대보다 더 위험한 것은 스스로를 양으로 여기는 늑대다. 그런 착각에 빠진 늑대가 되지 말아야 한다. 중간을 살려야 한다. 더 늦기 전에. 어른도 청소년도. 중간이 무너지면 모두 다 무너진다.

고(故) 김근태의 말을 기억하자. “정치적 중립은 그냥 중간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약한 편에 가깝게 다가가는 것이다.”

김경집 인문학자 전 카톨릭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