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포커스-김용우] 기억의 의무

입력 2012-07-29 18:53


1942년 7월 파리. 갑자기 들이닥친 경찰에 겁을 먹은 유대인 소녀는 어린 동생을 황급히 옷장 속에 숨긴다. 경찰이 돌아가면 동생을 꺼내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가족 전체가 체포되어 수용소에 감금된다. 오로지 동생 걱정으로 옷장 열쇠를 필사적으로 손에 쥔 소녀는 마침내 탈출에 성공해 집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동생은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숨진 동생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리던 소녀는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만다.

국내에도 개봉된 영화 ‘사라의 열쇠’의 줄거리이다. 1942년 7월 16∼17일 나치 독일의 점령 아래 수립된 프랑스의 비시정권이 주도했던 대대적인 유대인 검거가 이 영화의 배경이다. 프랑스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을 색출하라는 점령자 나치의 요청에 응한 비시정권은 이틀 사이에 파리와 파리 근교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유대인 1만3152명을 검거했다. 이 가운데 여성이 5919명, 어린이는 4115명이었다. 이들 대부분은 나치 수용소로 이송되어 살해당했다.

지난 16일부터 파리에는 이 비극적 사건을 추념하는 행사들이 곳곳에서 열렸다. 파리경찰청이 처음으로 사건 관련 문서를 공개하고 전시한 것도 70주년을 맞이한 이 사건의 추념 행사의 일환이다.

그러나 이 비극적 사건이 길고 어두운 망각의 터널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과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필요했다. 나치 독일의 패망 직후부터 프랑스는 나치의 비호 아래 수립된 비시정권의 자발적인 대독협력을 부정했다. 대신 비시정권은 그야말로 나치의 꼭두각시에 불과했으며, 실질적으로 나치에 협력했던 프랑스인들은 한 줌 밖에 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대부분의 프랑스인은 나치에 저항했다는 신화가 만들어졌다.

샤를 드골이 야심 차게 주도했던 레지스탕스의 신화는 그 수명이 그다지 길지 못했다. 1970년대를 기점으로 신화가 붕괴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제 70년 전 파리에서 벌어진 유대인 색출과 검거 선풍이 나치가 내세웠던 유대인 절멸정책에 어떻게 프랑스가 적극적으로 협력했는지를 웅변하는 사건임을 부정하는 사람은 드물다.

1995년 7월 16일 당시 대통령 자크 시라크는 역사상 처음으로 유대인 탄압의 책임이 비시정권에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사과했다. 비시정권은 프랑스공화국의 적출이 아니며 따라서 그 합법성을 인정할 수 없으므로 프랑스가 유대인 탄압의 책임을 인정할 필요가 없다는 오랜 전통과 결별을 선언한 사건이었다.

새로 선출된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은 한층 더 선명한 어조로 프랑스의 책임을 명확히 했다. “진실은 이 유대인 검거 작전에 단 한 명의 독일 병사도 동원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진실은 이 범죄가 프랑스에서 프랑스에 의해 저질러졌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그는 반유대주의뿐만 아니라 인간 집단들 사이의 증오를 부추기는 어떤 형태의 이데올로기와 광신도 프랑스에서 척결할 것임을 천명했다.

과거를 모두 기억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뿐 아니라 필요하지도 않다. 망각은 때로 새 출발을 위해 필수적이다. 그러나 동시에 잊지 말아야 할 일도 있다. 이른바 기억의 의무란 한 번 일어난 일은 또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뼈저린 역사적 교훈에서 출발한다. 600만명에 달하는 유대인을 학살한 나치의 만행 이후에도 인종주의는 사라지지 않았다. 지구촌 곳곳에서 발생한 대규모 인종 학살이 그 증거다.

최근 박정희 전 대통령의 5·16 군사쿠데타를 놓고 대선주자들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다. 5·16은 누가 뭐래도 일부 군부세력이 주도한 불법적인 권력찬탈 기도이다. 대선에서의 승리가 아무리 중요하다 하더라도 역사적 진실이 왜곡되거나 망각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우파, 좌파를 떠나 진실을 곧추세울 용기를 보여준 프랑스 대통령들의 예는 이 점에서 귀감이 된다.

김용우(호모미그란스 편집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