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 교회가 있었네-경북 영양군 사동교회] 동네에 웃음 꽃이 피었습니다… 은혜를 받았습니다

입력 2012-07-27 18:24


‘육지 속의 섬’이라 불리는 경북 영양군.

청송군에서 영양군으로 넘어가는 좁은 도로 주변으로 겹겹이 병풍처럼 솟아 있는 산악 지형이 장관을 이룬다. 영양군은 산세가 험한 태백산맥의 남쪽 끝자락에 형성된 산간 분지다. 면적은 서울의 1.3배에 달하나 군 인구는 1만8500여명에 불과하다.

영양군에서 태어난 청록파 시인 조지훈의 시심(詩心)을 간직한 듯 고즈넉하게 자리 잡은 마을 풍경에 한동안 시선을 뺏기다보면 청기면 사리에 도착한다. ‘절골’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을 정도로 불교색이 짙은 이 마을 어귀에 사동교회 십자가가 보인다.

“어데 가시니껴?”

봉고차를 몰고 가던 김성은 목사가 차창을 내리고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하자 한 어르신이 웃으며 답했다. 김 목사는 “처음에 여기 부임했을 때 어르신들이 쓰시는 사투리를 거의 못 알아들었다. ‘껴’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고 했다.

대부분 고추농사를 짓고 있는 마을 사람들은 강원도 억양이 들어간 경북 북부 사투리를 썼다. 영양군이 태백산 끝자락과 이어지는 내륙 지역에 있어 이런 경계어가 쓰이는 것으로 보인다. 경기도에서 자란 김 목사가 ‘강원남도’ 어르신들과 ‘프리 토킹’을 할 수 있기까지 2년이 걸렸다.

강원남도 어르신들의 미션 라이프

사동교회에는 60∼80대 8명, 어린이 16명이 출석하고 있다. 중·장년층 크리스천은 없다.

가장 열성적인 성도는 교회에서 2∼3㎞ 떨어진 토구리에 사는 이화교(68·여) 권사. 이씨는 “22년 전에 마실 사람들에게서 황당한 오해를 산 적이 있다”면서 얘기를 꺼냈다. 당시 목사가 오토바이 뒷자리에 이씨를 태우고 교회로 들어가는 장면을 목격한 마을 사람들이 안 좋은 소문을 냈다는 것.

이씨가 입방아에 오르내릴 당시 이 마을에 크리스천은 이씨를 포함해 한 손에 꼽힐 정도로 그 수가 적었다. “아지매가 목사님 오토바이 뒤에 타고 다니니까 별소리를 다 하더라꼬. 그런 일이 있고나서는 목사님이 날 델러 경운기를 끌고 우리 집에 오셨는데 그래도 말들이 얼매나 많은지….”

44년 전 이곳으로 시집 온 이씨는 “이 마실 주변에 동서들이 살았는데 다 절에 댕기서 내하고는 뭐 완전히 원수가 됐지”라며 한숨을 쉬었다. “첨에 시어른들이 뭘 믿어도 개안타 캤는데 막상 결혼하니까 ‘형편이 어렵다고 있다가 가라’고 캐서 억수로 힘들었어.”

남편 정찬극(69)씨를 전도하는 게 이씨의 최우선 목표다. 이씨는 싫다는 남편을 억지로 데리고 새벽기도에도 몇 번 갔지만 아직 온전히 전도하지는 못했다.

“아유, 이 양반은 30분도 몬 앉아있고 뒷구멍으로 도망가뿌는데 뭘”이라며 손사래를 쳤다. “와 교회 안 가니껴”라고 아내가 타박하자 정씨는 “아…. 날이 더웁다, 더버”라며 고개를 돌렸다. 이씨는 “구원 받을라카마 교회 나가야지”라며 혀를 찼다.

개머리에 사는 남경화(86) 할머니는 교회에 가기 위해 보행보조기를 끌고 마을 어귀까지 무거운 걸음을 옮긴다. 남 할머니가 교회까지 걸어가려면 1시간 넘게 걸리기 때문에 개머리 입구에서 교회 봉고차를 이용한다.

중풍으로 거동이 불편한 남 할머니가 주일 예배당에 꼬박꼬박 나가는 이유는 김 목사의 헌신 때문이다. 3년 전 봄에 숨을 헐떡이며 누워 있던 남 할머니를 김 목사가 영양읍 병원으로 모시고 간 적이 있다. 병원에서는 심근경색이라는 진단을 내렸고 남 할머니는 안동에 있는 큰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다. 자칫 병원에 늦게 갔더라면 생명이 위태로울 수 있었다.

이 지역 어르신들에게 예배당은 외로운 맘을 달랠 수 있는 안식처와도 같았다. 자식들이 모두 타지로 떠나고 홀로 고향을 지키다 보니 시나브로 발걸음이 교회로 향했다는 것. 남 할머니는 “나(이) 많아가 농사도 몬 짓고 할일도 없어 심심하이 (교회) 가는 기지 뭐, 별 이유 있나”고 털어놨다.

어르신들은 “예배당에 잠깐 들르세요”라고 권하는 김 목사에게 “밭일도 바쁜데…”라며 거절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추수감사절, 성탄절, 부활절 등 교회 절기를 몇 차례 보내면서 분위기가 조금씩 변했다. 어르신들이 먼저 “잔치는 또 언제 하니껴”라고 묻기도 하고 비슷한 연배끼리 교회에 나가 담소를 나눌 정도로 달라졌다.

김 목사는 “3년 전부터 떡과 과일, 국수, 김치 정도 차려놓고 절기를 보냈다”면서 “마을 어른들이 절기가 무언지 잘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기독교에 대한 거부감을 어느 정도 누그러뜨릴 수 있는 계기가 됐다”고 설명했다.

황폐화된 농촌 아이들의 삶

분노조절장애, 컴퓨터 게임 중독, 고추농사 돕기….

교회에 나가는 아이들 16명 가운데 절반인 8명이 조손 또는 한부모 가정에서 살고 있다. 그나마 고추농사 등으로 바쁜 보호자들이 아이들을 보살필 시간이 없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읍내와 멀리 떨어진 산골마을이라 아이들을 맡길 수 있는 보육·문화시설도 전무했다.

사설 교육시설이 있는 안동까지 버스를 타고 나가려면 1시간 넘게 걸린다. 안동까지 바로 가는 버스도 없어 영양읍에서 한 번 갈아타야 한다. 정식 교육기관은 청기면 당리와 정족리에 있는 초등학교 분교 두 곳뿐이다.

그러다보니 방과 후 사동교회로 달려가는 아이들이 많다. 1999년 처음 문을 연 33㎡짜리 교회 공부방은 이후 교회를 찾는 아이들이 늘어나 60㎡로 커졌고 지난해 사동지역아동센터로 지정됐다. 장미연 사모는 “여기 부모님들은 될 수 있으면 아이가 늦게까지 교회에서 밥 먹고 샤워도 하고 놀다가 왔으면 하는 눈치예요. 다들 고추농사로 바쁘시니까요”라고 설명했다.

김성훈(12·가명) 영아(10·여·가명) 남매도 집보다는 교회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다. 엄마는 가출했고 아빠는 돈을 벌기 위해 고향을 떠나 고추농사로 바쁜 할아버지 할머니가 남매를 돌보기 때문이다.

남매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할머니는 교회에 전화해 아이들을 맡아 달라고 부탁했다. 당시 성훈이는 친구들과 놀다가 갑자기 화를 내고 물건을 집어던지는 등 분노조절장애 초기 증세를 보였다. 영아는 또래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했고 늘 그늘진 얼굴이었다.

A양(13)도 어릴 적부터 외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외할머니는 손녀를 고추밭에 앉혀놓고 밭일에 매달리는 때가 많았다. 부모의 따뜻한 사랑을 받지 못한 A양은 혼자 흙을 만지며 놀거나 집 근처를 배회하기도 했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뒤로 A양은 말버릇이 나빠졌고 괴팍하게 굴어 친구들로부터 왕따를 당하게 됐다.

‘문제 아이들’은 교회에서 미술치료, 동시 쓰기, 사물놀이 체험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접하면서 점차 안정감을 찾기 시작했다. 장 사모는 “말썽을 일으키는 아이들을 때로 혼내기도 하는데 교회를 싫어하는 부모님들이 많아 괜한 오해를 살 때가 있다”고 했다.

‘귀농 크리스천’이 일으키는 작은 변화

마을 사람 수 자체가 워낙 적고 복음화율이 도시보다 크게 떨어지는 농촌. 이런 특성 때문에 ‘귀농 크리스천’들이 주목을 받고 있다.

경남 창원의 대학에서 교수로 있다가 은퇴한 조기연(59)씨. 그는 지난 3월 폐교 부지를 사들여 이 지역에 정착했다. 조씨는 “막연히 텃밭을 가꾸면서 시골 아이들을 위한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들어왔는데 처음에는 도울 일이 없어 막막했다”고 했다. 폐교 인근에 살고 있는 어린이는 단 2명뿐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시골이라지만 너무 애들이 없잖아요. 그런데 마을로 들어오던 길에 우연히 사동교회에 들렀는데 이 지역 애들이 거기 다 모여 있었어요. 아이들에게 꼭 필요한 일이 뭐가 있을까 목사님과 상의한 끝에 폐교 터에 아이들이 맘껏 뛰어놀 수 있는 축구장을 만들어주기로 했습니다.”

조씨는 또 폐교 1층을 리모델링해 아이들이 연주회를 열 수 있는 작은 공연장을 만들 계획이다. 아내 한정선(54)씨도 교회에서 아이들에게 피아노 레슨을 하는 한편 찬양 반주를 하고 있다.

교회 아동복지교사로 일하는 장영아(32·여)씨도 귀농한 주민이다. 두 살짜리 아이의 기관지염이 잘 낫지 않자 6개월 전에 울산에서 공기 좋은 영양군 일월면으로 이사를 왔다. 교회일을 하면서 고추농사를 짓고 있다.

장씨는 처음에 기독교에 대한 반감이 컸다. “특히 헌금을 하는 게 좋지 않아 보였다. 목사님이 다 가져가시는 돈처럼 보였기 때문”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하지만 교회에서 두 달쯤 아이들을 돌본 이후 장씨는 크리스천이 됐다. 그는 “가난한 목사님이 사재를 털어서까지 시골 아이들을 위해 봉사하는 모습은 신선한 충격이었다”고 했다.

사동교회는 승려였다가 회심한 김진규 목사가 1973년 개척한 이후 교역자가 15번 바뀌었다. 2006년 이곳에서 사역을 시작한 김성은 목사는 “복음 전도를 위해 함께 땀 흘릴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게 가장 극복하기 힘든 과제”라고 말했다.

“‘너는 본토 고향집을 떠나 내가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아브라함처럼 하나님만을 믿으며 그 길에 나설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농촌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도전하는 삶을 살 수 있는 단 한 사람이 절실한 곳이 바로 이곳입니다.”

▶사동교회 가는 길

서울에서 자가용을 이용하면 4시간 넘게 걸린다. 경부고속도로를 따라가다 신갈분기점에서 영동고속도로로 진입, 만종분기점에서 중앙고속도로로 갈아탄다. 이후 봉현교차로에서 5번 국도를 탄 뒤 36번 국도로 진입한다.

서천교사거리에서 영주육교로 진입한 다음 금봉교차로에서 918번 지방도로를, 이어 도천삼거리에서 안동 방면 35번 국도로 진입한다. 명호삼거리에서 노루목재길로 들어가 고계삼거리에서 다시 918번 지방도로를 따라가면 왼쪽에 사동교회가 보인다.

영양=김경택 기자 ptyx@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