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현의 사막의 구도자들] 땀 흘려 일하는 것의 가치는…
입력 2012-07-27 18:24
1996년 말경 나는 독일의 한 의대생을 만난 적이 있다. 때는 내가 프랑스의 스트라스부르에서 불란서어를 배우던 시절이었다. 그 의대생은 스트라스부르의 루이 파르퇴르(Louis Pasteur) 의대에서 공부하기 위해 어학을 준비하고 있었다. 훤칠한 키에 호리호리한 몸매였던 이 친구는 두어 번이나 나를 파티에 초대하는 등 제법 나를 챙겨주곤 했다. 하루는 이 친구가 프랑스에 대해서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독일에서는 청소부를 한다고 해서 무시하지도 않고 변호사를 한다고 해서 부러워하지도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프랑스는 이상하게도 직업의 귀천을 따지고 그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는 고약한 습성을 갖고 있다는 게 요지였다. 그 친구는 의대를 졸업하고 의사가 되면 경제적으로 상위계층에 속해서 살아갈 터인데, 막노동을 하는 직업을 천하게 보는 프랑스 사회를 아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비단 독일뿐 아니라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등 북유럽의 국가들은 ‘이건 천한 직업’, ‘저건 귀한 직업’ 등으로 흑백을 따지지 않는다. 어찌하여 북유럽의 국가들은 직업의 귀천을 따지지 않고, 직업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것일까? 단언하면 기독교적 정신 때문이다.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가 1920년에 ‘개신교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라는 책을 발표했다. 베버의 논지는 직업을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으로 받아들이는 장 칼뱅(요한 칼빈)의 직업소명설이 자본주의 발달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다. 노동을 거룩하게 생각하는 태도는 칼뱅뿐 아니라 종교개혁의 선구자인 마르틴 루터도 공유하던 바였다. 나는 베버의 주장을 전적으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자본주의의 발달에는 다른 여러 가지 요소들이 더 중요한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노동을 하나님의 뜻으로 알아 고귀하게 받아들이는 태도야말로 오늘날 북유럽 사람들의 평등주의적 직업관을 만들어 내는 데에 결정적으로 공헌했다고 확신한다.
그런데 노동을 하나님의 뜻과 섭리로 받아들이는 거룩한 노동관(勞動觀)의 원조는 누구일까. 그것은 바로 사막 수도자의 아버지로 불리는 안토니오스였다. 안토니오스가 홀로 사막에 머물며 구도자로 살아가던 중 한번은 더 이상 기도하기 힘든 정신적인 공황 상태에 빠졌다. 떠나온 세상에 대한 생각이 그를 사로잡았다. 도시의 찬란함도 눈앞에서 어른거렸고 가족에 대한 애틋한 기억도 뭉게구름처럼 솟아올랐다. 안토니오스는 “너무나 고통스러운데 어떻게 해야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까”라고 기도했다. 그런데 그가 문을 열고 수실(修室) 밖으로 나갔을 때에 한 천사가 앉아서 일하다가 일감에서 일어나 기도하고, 다시 앉아서 줄을 꼬더니 또 기도하는 것이었다. 천사는 그에게 “이처럼 행하라. 그러면 구원받을 것이다”라고 했다.
‘기도하며 일하라! 일하며 기도하라!’ 안토니오스부터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온 이 가르침은 곧 사막수도의 황금률이 되었다. 사막의 구도자들에게 있어서 노동은 기도이고 기도는 곧 노동이었다. 나일강변에서 많이 나는 골 풀로 돗자리를 짜거나 바구니를 만드는 것이 주된 노동이었고, 기도는 시편을 암송하는 방식으로 행했다. 노동 없이 기도만 하면 ‘악하고 게으른 종’이 될 뿐이며(마 25:26) 기도 없는 노동은 탐욕의 노예를 잉태할 뿐이었다. 한편으로 쉬지 말고 기도하라(데전 5:17)고 했지만 다른 한편에는 밤낮으로 일하라(데후 3:8)고 했으므로 이 두 가지를 서로 조화시켰다. 바실리오스 수도원의 경우 밭일과 기도를 결합시켰고, 새벽기도, 오전 9시, 12시, 오후 3시, 9시, 자정 등 하루 여섯 번의 기도시간을 정해놓았다. 아울러 책을 필사하는 정신노동도 육체노동과 같은 것으로 간주되었다.
5세기 초 파코미우스 수도사들은 수공업, 목축, 양돈, 직물, 출판 분야 등 다양한 노동과 기도를 결합했다. 땀 흘려 일하는 것과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결합했던 4세기 수도원의 정신은 오랜 세월 동안 서구 역사에 녹아들었고 16세기 종교 개혁가들이 계승했으며 이렇게 하여 서유럽의 개신교 국가들은 노동의 귀천을 따지지 않은 기독교적 노동관이 상식으로 통하는 사회가 된 것이다. 내가 만난 그 독일 의대생은 직업의 귀천을 따지지 않고 노동 일반을 중하게 생각하는 16세기 개신교 사상가들의 후예인 동시에 4세기 사막 수도자의 후예였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을 보면 한숨이 앞선다. 갖가지 통계가 너무나 현란하여 아시아의 기독교 국가라는 자부심이 한순간에 부끄럽게 변한다. 최저임금은 시간당 4580원(2012년 기준)으로 주당 40시간(월 209시간)을 일할 경우 고작 96만원 정도의 월급을 받는다. 우리나라의 최저임금은 OECD 국가의 평균 최저임금의 절반 정도에 불과하며 우리나라보다 낮은 나라는 멕시코, 터키, 체코 등 몇 나라 되지 않는다. 임금은 낮은 반면, 우리나라의 노동 시간은 2193시간으로 OECD 국가 중에서 가장 길다. 지난 7월 10일 보건사회연구원이 발행한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행복지수는 34개국 중 꼴찌에서 두 번째인 32번째라고 한다. 이쯤 되면 경제성장이니 경제발전이니 하는 것이 빛 좋은 개살구가 아닌가 싶다.
이러한 지표들은 땀 흘리는 대가를 제대로 지불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현실을 반영한다. 땀 흘리는 것은 기도처럼 거룩한 것이다. 논리의 비약일지는 모르지만, 나로서는 노동을 천대하는 것은 기도를 천대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보고 싶다. 노동은 기도이고 기도는 노동이다. 기억하자. 땀 흘리는 것이 정당하게 대가를 지불받는 사회야말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회라는 것을 말이다.
<한영신학대 교수·캐나다 몬트리올대 초청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