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마가를 찾아서] (31) 약속의 땅 베네치아

입력 2012-07-26 18:07


마가가 나사렛 사람 동원해 베네치아를 건설했다면…

베드로의 구술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과 가르침을 받아 적은 마가는 예루살렘에 닥쳐올 위기를 매우 급박한 것으로 인식하여 대규모의 그리스도인이 이주할 수 있는 땅을 찾고 있었을 것이다. 그가 볼 때 아드리아해 북단 베네토만의 버려진 개펄은 적은 비용으로 새 도시를 건설하는 데는 더없이 적합한 곳이었다. 또 베네토만은 티레니아해 북단의 게누아만과 대칭적인 위치여서 페니키아 상인들이 갈리아와 게르마니아 진출의 거점으로 삼은 게누아항과 경쟁할 만한 항구를 건설할 수도 있었다.

“마가가 베네치아 건설에 관여했다면?”

버려진 개펄과 섬들을 연결해 수상 도시를 건설하려면 우수한 건설 기술자들이 필요했다. 마가가 그것을 계획했다면 아마도 나사렛의 기술 인력을 떠올렸을 것이다. 솔로몬의 성전 공사에서 두로 사람들에게 주도권을 빼앗겨 소외된 레갑의 기술 집단은 후일 바벨론으로 끌려가 각종 건설 공사에 동원되었고, 고레스 왕의 칙령으로 귀환한 스룹바벨의 주도로 BC 516년에 초라한 제2 성전을 완공했다. 그러나 BC 20년 헤롯 왕이 그 성전을 철거하고 웅장한 성전을 착공하자 레갑 사람들은 죄인을 자처하며 나사렛에 살고 있었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 2:19)

자신들의 손으로 새 성전을 지으리라고 다짐해 온 나사렛 사람들은 건축 기술자 요셉의 아들인 예수의 그 말에 큰 기대를 걸었다. 나실인의 계율을 엄격하게 지키던 그들은 예수가 포도주를 마신 것에 실망해 그를 배척했다. 그러나 그가 부활하여 승천하자 나사렛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예수의 제자가 됐다. 유대인들이 예수의 제자들을 ‘나사렛 사람’이라 며 박해할 때 나사렛에 살던 모든 사람들도 그 대상에 포함된 것이다. 그러므로 마가가 그들에게 베네치아 건설에 나서달라고 제의했다면 필시 동의했을 것이다.

“레갑의 아들 요나답에게서 내 앞에 설 사람이 영원히 끊어지지 아니하리라.”(렘 35:19)

나사렛 사람들이 베네치아의 건설을 주도했다면 그 지휘자는 누가 되었을까. 소설 ‘마르코스 요안네스’에서 필자는 예수의 아우 ‘요셉’을 끌어냈다.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막 6:3)

나사렛에 살던 레갑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예수의 네 아우들도 역시 예수의 가르침을 신뢰하지 않았다(요 7:5). 그러나 예수의 승천 후 오순절에 마가의 집 다락방에서 그의 아우들은 예수의 제자들과 함께 기도하다가 모두 성령을 받았다. 그들 중 야고보는 AD 44년 베드로가 예루살렘을 떠난 후 예루살렘 교회의 책임자가 되었고, AD 62년 그 야고보가 순교한 후 다시 시몬이 그 자리를 물려받았다(유세비우스 ‘교회사’ 4-5). 예루살렘이 멸망한 AD 70년경 유다는 ‘유다서’를 기록했다. 그들 형제 중 오직 ‘요셉’은 그의 행적이 드러나 있지 않다.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하실 때에 삼십 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위는 헬리요.”(눅 3:23)

필자는 ‘낳고’로 이어지는 마태복음의 계보는 혈통의 계보이나, ‘그 위는’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누가복음의 계보는 ‘레갑 사람들’ 같은 어떤 집단을 이끄는 지도자의 계보로 추정했다.

필자의 추정대로라면 ‘요셉’은 그 집단의 마지막 지도자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요셉은 ‘예수’를 포함한 다섯 명의 아들들 중에서 그 셋째 아들에게 자신의 이름 ‘요셉’을 물려주었다. 예수는 이미 주의 사자가 이른 대로 ‘구원자’가 될 것이므로 자신의 일과는 관계가 없으리라 생각했고, 야고보는 그 기질로 보아 기술자보다는 열심당에 더 가깝다고 보았을 것 같다.

“내 때는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요 7:6)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집단 이주를 위해 도시를 건설할 기술자들을 확보했다고 하더라도 개펄과 섬들 밖에 없는 곳에 수상 도시를 건설하는 일은 그리 쉽지 않았을 것이다. 처음에는 베네토만에 기술자들의 천막 촌이 생겼을 것이다. 그들은 헤롯이 가이사랴를 건설할 때처럼 수많은 돌들을 바다에 쏟아 부어 매립해야 했을 것이고, 그 일을 위해 또 여러 장비들이 고안되고 제작됐을 것이다. 개펄과 118 개의 섬들은 4백여 개의 다리로 연결돼 수많은 운하들을 만들었고 마침내 선박이 드나들게 되었다.

해상 교역이 본격화되고 예루살렘 성도들의 집단 이주가 시작되면서 마가의 상단은 자체 소유의 전용선이 필요했다. 당시에 가장 큰 조선소는 아가야 지방의 수도 고린도에 있었다. 헬라스 연합군의 군선을 건조하던 조선소였다. 마가는 전용선을 발주하기 위해 고린도에 갔다가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를 읽었을 것이다. AD 53 년 제3차 선교 여행에 나선 바울은 에베소의 두란노 서원에 2년 동안 머물면서 예수의 가르침을 강론하고 있을 때 고린도 교회에 파벌이 생겼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고린도 전서’를 써서 보냈던 것이다.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니.”(고전 1:12)

바울은 사명과 은사가 달라도 하나가 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4-7)

베네치아가 역사의 표면으로 떠오른 것은 5세기경이었다. 그 시점은 베네치아의 상인들이 알렉산드리아로 건너가 마가의 시신을 옮겨가기 위해 그의 묘를 지키는 사제들과 협상했다는 AD 467년과 거의 일치하고 있다. 그것은 또 베네치아의 교역 능력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해 거래 규모가 게누아와 경쟁할 수 있을 정도로 지중해를 왕래하는 상인들 사이에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무역 중개로 세력을 키운 베네치아의 특산물은 섬유 제품, 유리 및 보석과 금속 세공품 그리고 도자기류와 가죽 제품 등이었다.

베네치아 주민들은 그들의 지도자를 자신들이 뽑았다. AD 697년에 최초의 도제(Doge·총독) 파올로 루치오 아나페스토가 선출됐고 비잔티움 황제의 인정으로 ‘베네치아 공화국’의 자치가 시작됐다. AD 832년 그들은 알렉산드리아에서 옮겨온 마가의 남골당에 마가 기념 교회를 건설했다. 베네치아는 뛰어난 상술로 비잔티움의 신뢰를 얻어 AD 1096년에 시작된 십자군 원정의 후원자가 되었다. 그러나 베네치아는 늘 바른 신앙 노선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십자군이 그 목적을 이탈하여 수탈과 살인을 일삼자 베네치아는 교황청과 결별했다.

제4차 십자군 원정 때 지원을 중단한 베네치아는 지원을 재개하는 조건으로 그들을 이용해 헝가리인들이 차지하고 있던 짜라(Zara)를 손에 넣었고, 교황은 베네치아에 협력한 십자군을 파문했다. 베네치아는 다시 콘스탄티노플을 공격, 게누아와 동맹한 동로마의 황제 알렉시스 3세를 제거하고 아이작 2세를 복귀시켰다. 그러나 아이작 2세가 궁정 반란으로 살해되자 베네치아는 AD 1204년 십자군과 함께 콘스탄티노플을 점령, 라틴 제국을 세웠다. 십자군과 베네치아는 콘스탄티노플에서 동방교회를 제압한 공으로 교황청과의 관계를 다시 회복했다.

라틴 제국 건설은 상업 도시 ‘베네치아’가 경쟁자 ‘게누아’를 제압한 상징적 사건이었다. 다시 AD 1261년 게누아의 지원을 업은 팔레올로구스가 라틴 제국을 제압하고 동로마를 재건하게 된다. 그러나 라틴 제국 사건으로 베네치아는 지중해 상권에서 당당히 게누아와 맞서는 세력으로 등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AD 1610년 베네치아 공화국은 교황청과 개신교와의 분쟁을 개신교에 유리하게 중재하여 교황청으로부터 파문당했다. 페니키아 상인의 거점 게누아와 늘 맞서온 베네치아는 가나안 문화를 지지하는 반그리스도교 세력의 공격대상이 되었다.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냐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냐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요일 2:22)

르네상스 시대에 교회 공격의 선봉장이 된 셰익스피어(1564-1616)는 대표적인 반그리스도교 작가였다. 그의 대표작 ‘햄릿(Hamlet)’의 이름은 ‘함의 자손’이라는 뜻이었고, ‘비너스와 아도니스’의 비너스는 가나안의 장사꾼들이 만들어낸 여신 ‘아스다롯’의 로마식 이름이었다. 베네치아의 그리스도인들을 혐오한 그는 AD 1594년 희곡 ‘베니스의 상인’을 써서 그리스도인과 유대인을 싸잡아 조롱했다.

김성일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