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슬로시티… ‘느림의 미학’을 걷는다] ① 삼지내마을 & 전주한옥마을
입력 2012-07-25 18:22
슬로시티(Slow City)는 속도 지향 사회에 반대해 아름다운 자연환경 속에서 전통생활방식으로 느리게 사는 삶을 지향한다. 2002년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 그레베의 파울로 사투르니니 시장이 패스트푸드 상징인 맥도날드 상륙에 반발해 “느리게 살자”고 호소하면서 슬로시티가 유럽 곳곳에 확산되기 시작했다. 현재 지구촌 슬로시티는 25개국 150개 마을. 우리나라는 아시아 최초로 2007년 지정된 전남 담양의 창평 삼지내마을을 비롯해 10곳이 슬로시티다. 국민일보는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의 후원으로 한국관광 명소로 부상한 슬로시티를 이달부터 매달 마지막 주에 2곳씩 소개한다.
삼지내마을 (전남 담양)
정겨운 돌담길을 따라 실개천이 흐르는 담양 창평면의 삼지내마을은 500년 역사의 창평 고씨 집성촌. 1592년 임진왜란 때 의병장을 지냈던 고경명 장군의 후손들이 모여 살던 마을로 고정주 고택을 비롯해 고재선 가옥, 고재환 가옥 등 1900년대 초 건축된 한옥 20여 채가 고즈넉한 풍경화를 그린다.
삼지내마을을 포함한 창평면은 한때 천석꾼이 600여 호에 이를 정도로 부촌이었지만 지금은 여느 마을과 크게 다르지 않다. 아낙들은 텃밭에서 호박잎이나 고추를 따서 밥상을 차리고, 들일하던 촌로들은 마을정자인 남극루에서 한낮의 더위를 피해 정담을 나누는 등 낯익은 풍경을 연출한다.
하지만 담쟁이덩굴에 둘러싸인 3600m 길이의 돌담길을 느릿느릿 걷다보면 이곳이 왜 슬로시티로 지정됐는지 짐작하게 된다. 특이하게도 삼지내마을에는 달구지, 한옥에서, 돌담집 등 한옥민박집 외에 빈도림 생활공방, 수의바느질, 야생화 효소, 산야초 효소, 종부의 다실, 약초밥상 등 형형색색의 문패가 방문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붉은 벽돌 굴뚝이 멋스런 ‘빈도림 생활공방’은 귀화 독일인 빈도림씨가 바느질 솜씨 좋은 한국인 부인과 함께 천연초 등을 만드는 공방. 최근에는 서울에서 귀촌한 후 마을에서 전통혼례를 올린 젊은 부부가 함께 살고 있다. 드넓은 마당에 발 디딜 틈도 없이 1000여 종의 야생화가 빼곡하게 자라는 ‘야생화전시관’은 야생화 사진작가였던 임은실씨가 야생화 효소를 만드는 작업장.
마을 한가운데에 위치한 최금옥씨의 ‘약초밥상’은 백야초, 곤드레, 산초, 쑥부쟁이, 민들레, 방풍, 가죽나무 등 최씨가 산에서 직접 채취한 약초를 효소와 간장을 이용해 장아찌로 만든 밥상을 맛볼 수 있는 곳이다. 36가지의 약초 장아찌를 넣은 후 다래고추장으로 비벼 먹는 약초밥상은 삼지내마을을 대표하는 슬로푸드. 이밖에 쌀엿을 만드는 유영균씨 등 주민이 마을의 얼굴인 창평슬로시티의 명인은 모두 26명.
담양군은 2007년 창평슬로시티가 지정된 후 마을을 어떻게 가꿀지 고민하다 대를 이어 마을에 살면서 저마다의 특기를 가진 마을 주민들을 명인과 교사로 육성했다. 주민들의 슬로라이프와 슬로푸드가 슬로시티의 이미지에 걸맞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달팽이학당이다.
방문객들에게 슬로시티 체험 프로그램을 짜주는 마을 외곽의 슬로시티방문자센터는 마을 주민들이 스스로 체득한 슬로라이프를 강의하는 달팽이학당을 겸하고 있다. 자연에서 터득한 지혜를 손에서 손으로 전해주기가 쉽지 않지만 주민들은 주경야독을 통해 저마다 스타강사로 거듭났다. 슬로시티방문자센터의 너른 마당에서 매주 토요일 열리는 달팽이시장은 주민들이 느리게 살아가는 과정에서 탄생한 슬로푸드와 슬로아트가 한자리에 모이는 공간. 즉석에서 요리법 강의도 열리는 시장은 주민과 방문객들의 소통의 장이자 마을잔치가 열리는 축제의 장이기도 하다.
창평슬로시티에는 슬로시티 내 마을들을 이어주는 자전거길도 조성됐다. 오래된 마을의 옛 풍경이 고스란히 살아있는 ‘싸목싸목길’, 장전이씨고택과 장화리로 이어지는 ‘미암길’, 배롱나무가 멋스런 ‘명옥헌원림길’이 대표적. 슬로시티방문자센터에서 자전거도 빌려준다.
◇여행메모=호남고속도로 창평IC에서 창평면소재지까지 자동차로 3∼4분. 광주 홈플러스 앞에서 삼지내마을까지 303번 버스 운행. 창평국밥으로 유명한 창평오일장은 끝자리가 0과 5일인 날에 열린다. 인근 담양읍내에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길과 죽녹원 등이 있다(창평슬로시티방문자센터 061-383-3807).
전주한옥마을 (전북 전주)
전주한옥마을은 마을의 역사와 삶의 흔적이 화석처럼 새겨진 골목길을 어슬렁어슬렁 해찰하며 걸어야 제맛이다. ‘해찰’은 전라도 사투리로 딴 길로 새는 것을 일컫는 말. 이곳에서는 어느 골목길로 해찰해도 막힌 곳 없이 모두 이어져 제자리로 돌아오게 된다.
700여 채의 한옥이 골목길을 사이에 두고 옹기종기 처마를 맞댄 전주한옥마을의 역사는 1910년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오른다. 전주에 온 일본인들이 전주성 안으로 진출하자 이에 반발해 전주사람들이 교동과 풍남동 일대에 한옥을 짓고 모여 살면서 지금의 한옥마을을 이루게 됐다.
전주한옥마을의 중심거리는 풍남문에서 오목대까지 이어지는 태조로. 회화나무 가로수가 멋스런 태조로에는 근대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전동성당이 이채롭다. 비잔틴 양식과 로마네스크 양식이 섞인 전동성당은 영화 ‘약속’에서 결혼식 장면이 촬영됐던 곳으로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비치는 햇살이 황홀하다.
전동성당 맞은편의 경기전은 최근 국보로 승격된 조선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봉안한 곳. 경내에는 어진을 모신 본전과 전주 이씨 시조인 이한의 위패를 봉안한 조경묘, 조선실록을 보관했던 전주사고, 예종의 탯줄을 묻은 태실 등이 짙은 녹음 속에서 조선의 맥을 이어오고 있다.
태조로와 교차하는 은행로는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 거리. 은행로는 조선의 흥망성쇠를 지켜본 수령 600년의 은행나무가 뿌리를 내리고 있어 붙여진 명칭. 이 은행나무 뿌리 근처에서 자라난 8년생 은행나무는 DNA 검사 결과 600년생 은행나무의 친자로 확인돼 한때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은행로는 아트마켓이 열리는 매주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공예품을 파는 주민들과 이를 구경하는 관광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 앙금이 하얀 마패호두과자, 추억의 도시락, 연근도넛, 꿀타래 등을 파는 상점과 한옥을 개조한 카페, 그리고 공방이 모두 은행로를 따라 늘어서 있다. 은행로에 조성된 인공수로는 어린아이들의 물놀이터로 인기.
전주한옥마을에는 전통문화시설도 많다. 골목길을 걷다보면 한지와 술, 풍물, 전통혼례, 다도, 춤 등 다양한 테마를 담은 전통문화 체험시설이 발길을 붙잡는다. 집집마다 술을 빚던 가양주의 전통이 오롯이 살아있는 전통술박물관, 한지공예품 등 명장의 숨결을 느껴보는 전주공예품전시관, 전주부채 등 명품을 감상하고 쇼핑하는 전주명품관, ‘혼불’ 작가 최명희의 삶과 문학을 엿보는 최명희문학관은 골목길에서 만나는 한옥마을의 명소.
전주한옥마을 여행의 대미는 전통한옥에서의 숙박체험. 고풍스럽고 기품 있는 한옥은 오래된 친구처럼 편안하고 아늑하다. 넓은 마당과 고풍스런 평상이 멋스런 동락원, 조선의 마지막 황손인 이석씨가 머물고 있는 승광재, 백범 김구 선생이 묵은 곳으로 유명한 학인당은 대표적인 숙박체험시설.
골목길을 사이에 두고 옹기종기 처마를 맞댄 전주한옥마을을 한눈에 보려면 오목대에 올라야 한다. 나지막한 야산에 위치한 오목대는 이성계가 황산대첩 개선길에 들러 잔치를 베풀었던 곳. 오목대에서 내려다보는 한옥마을은 한 폭의 풍경화. 처마를 맞댄 기와지붕의 유려한 선과 우뚝우뚝 솟은 고층건물이 곡선과 직선, 과거와 현재의 조화를 상징한다.
◇여행메모=‘대한민국 으뜸명소’와 ‘2010 한국관광의 별’로 선정된 전주한옥마을은 2010년 슬로시티로 지정됐다. 슬로시티 지정 후 한 해 관광객이 400만명으로 늘어났다. 한옥마을 인근의 가족회관은 전주비빔밥 명인 김년임씨의 ‘작품’을 맛볼 수 있는 곳(한옥마을 관광안내소 063-282-1330).
담양·전주=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