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방우체국-파푸아뉴기니 문성 선교사] (23) 십자가의 능력 (네 번째 이야기)

입력 2012-07-25 21:23


“죄=하나님 말씀 어기는것” 부족 형제들 놀라운 변화

코라 부족 형제들이 사용하는 미히(mihi) 말에는 죄, 용서라는 단어가 없다. 죄를 단순히 나쁘다고 말하고 용서는 남의 잘못을 잊어버렸다고만 말한다. 죄라는 단어가 없다는 것은 죄라는 의식이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죄란 이런 것을 죄라고 한다고 전하여도 그것이 왜 죄라고 하는지를 온전하게 인지하지 못한다. 용서 또한 온전히 남의 잘못을 잊을 수 없는 우리가 용서의 의미를 모르면서 “잊었다”라 하는 것은 위선이다. 죄의식과 용서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의 생각과 삶이 어떠한지 우리는 가늠할 수 없다. 아마 이성적인 판단을 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오직 감정에만 의존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래서 더욱더 죽음의 공포 속에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죄란 단어도 없고 죄의식도 없이 살아가던 형제들이 말씀을 듣고 죄의 뜻을 스스로 알아간다. 죄를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것”이라고 말한다. 얼마나 놀라운 표현인가?

하나님만이 온전히 우리의 죄를 잊으시고 용서하실 수 있다. 나는 그 긍휼하심의 자비와 용서를 은혜로 누리고 있으면서 참된 용서의 의미를 의식하지 못한다. 언제나 무의식 속에 살아간다. 용서를 알지 못하니 죄를 모르고, 죄를 모르니 죽음의 공포를 모르고, 죽음을 모르니 복음이 복음이 되지 못한다. 아! 이 타락한 죄인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선교사님 저를 좀 도와주십시오. 제가 돼지를 죽였습니다.” 제자 무알레가 칠흑 같은 밤에 정글에서 죽은 돼지를 어깨에 메고 땀을 흘리며 올라와 다급하게 도움을 청하였다. “내 밭의 고구마를 훔쳐 먹고 밭을 망가뜨리는 돼지를 보고 화가 나서 칼을 던졌는데 칼이 돼지의 옆구리에 꽂혀 돼지가 죽었습니다. 아무도 본 사람이 없어서 전처럼 땅에 묻어 버리고 숨기려고 하였지만 옳은 일이 아니라는 생각에 가져왔습니다.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청년들이 남의 새끼 돼지나 닭을 몰래 잡아먹고 숨기는 일이 있다. 만약에 돼지 주인이 알게 되면 싸움이 일어나거나 몇 배로 갚아 주어야 한다. 그래서 몰래 땅에 묻어 버리는 경우가 있다. 더군다나 죽은 돼지는 서로 사이가 좋지 않은 아버지의 배다른 형제의 돼지였다. 그런데 싸움이나 배상을 두려워하여야 할 무알레가 숨길 수 있는 기회를 버리고 사실을 말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배가 고파도 훔치지 않고, 두려워도 숨기려 하지 않고, 누가, 무엇이 이 형제들에게 양심을 통하여 전해지는 말씀에 순종하도록 의지를 통제하였는가?

형제들의 삶은 이전과 변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살아가는 움막도 더럽고 지저분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먹는 음식도 언제나 고구마와 차코라는 풀이다. 주위 환경도 아무것도 이전과 달라지거나 변한 것이 없다. 상대적 빈곤을 느낄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말씀을 듣고 구원받은 형제들은 죽음의 공포에서 자유함을 누리며 기뻐한다. 변화되어가는 성품으로 새롭게 살아간다. 이전과 다른 맑은 눈과 밝은 얼굴로 아내와 자녀를 사랑으로 돌본다. 형제들을 자유하게 한 것은 바로 십자가의 능력이다. 부족 형제들의 삶을 통하여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가치를 세우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이다. 이 세상 어디에도 죽음의 공포에 대한 가치관을 바꾸는 교육도 철학도 과학도 종교도 없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으로만 가능하다.

“이제 나의 소망이 천국에 있으니 나에게 더 이상 좋은 음식은 물론 약을 투여하지 말아라!”

86세의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한 달 전 금식을 하시며 하셨던 마지막 유언이었다. 나약한 어머니셨지만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믿음의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리스도인마다 죽음이 임박하였을 때 무엇이라 말하겠는가! 이 세상에서의 삶을 마치면서 천국의 소망 때문에 기뻐하지 않겠는가?

죽음 앞에서 “슬퍼하지 말아라. 찬양을 하여라!” 이 말처럼 놀라운 가치관의 변화가 어디에 있는가. 형제들은 말씀을 듣고 변하기 시작한다. 죽음의 공포로 두려워하던 형제는 자유와 평안함을 누리기 시작하고, 언제나 싸움하던 형제들은 싸움을 멈추고, 과거의 풍습을 따르던 형제는 예배를 사모하고, 천국을 소망하고, 제자들은 자신들의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는 일에 자부심을 갖는다. 변화된 생각, 변화된 가치관, 변화된 삶, 부족 형제들을 보면서 스스로 선을 행할 수 없는 죄인 된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복음 안에서 이성적인 가치관으로 살아 갈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를 입는 것인지 알 수 있다.

세상에서는 고난과 고통은 피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 고난과 고통은 그때마다 기도를 통하여 십자가의 주님을 만나는 축복된 시간이며 사건이 된다.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는 감격의 시간이 된다. 그래서 고난은 그리스도인에게 유익이 되며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삶을 누리게 된다. 아버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고난 가운데 있게 하사 언제나 깨어 기도하게 하옵시고, 고난 가운데 주님을 만나는 축복을 누리게 하옵소서.

부족 형제들은 구약의 말씀을 듣고 죄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죄라는 말이 없고 죄의식도 없던 형제들이 죄를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것이라고 스스로 말한다. 그리고 공의의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한다. 그들은 복음을 듣고 죽음의 공포에서 자유함과 기쁨을 누린다. 죽음의 공포를 뛰어넘는 삶의 변화를 간증한다. 구원 받았다고 삶의 질이 갑자기 달라지거나 환경이 변화하는 일는 없다. 그러나 변화된 영혼의 가치관과 인격을 나누며 복음의 능력에 기뻐한다. 이것은 십자가에서 행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능력이다.

돈과 권력의 가치는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피의 가치를 세우는 데 있다. 피하고 싶던 고난과 고통은 고난 가운데 십자가의 주님을 만나는 기쁨이 됐다. 공포와 종말의 두려움이었던 죽음은 영원한 천국에 대한 소망이 됐다. 인간이 세상에 태어난 가치는 하나님을 아는 축복을 누리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능력 안에서 세상은 우리를 감당치 못한다.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말씀과 복음의 능력이다. 십자가의 능력이다.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최고의 영광이다.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뜻이 이루어진 최상의 기쁨이다.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의를 온전하게 이루었다.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는 사랑이신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어진 최상의 사랑의 표현이다. 이 죄인 복음 알게 하시고 그리스도인의 가치관으로 살아가게 하시니 감사하나이다.

● 문성 선교사

문성(60) 선교사는 아내 이민아 선교사와 함께 20년째 파푸아뉴기니 선교를 하고 있다. 지병인 박리성대동맥류 때문에 인공동맥을 차고 있다. 선교지 코라 부족은 식인을 할 정도로 원시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