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출판] 세상을 바꾸는 설교에 대한 처방전
입력 2012-07-24 18:02
텍스트가 설교하게 하라/월터 브루그만 지음, 홍병룡 옮김/성서유니온선교회
나는 성경 펴놓고 자기 이야기만 실컷 하는 설교, 성경 읽고는 처세술과 자기계발법을 일러주는 설교, 창세기를 낭독하고는 로마서 이야기하는 설교가 정말 싫었다. 성경을 가르치지 않고 설교자가 구독하는 신문을 옮기는 설교에 화딱지가 났다. 보수적이거나 진보적이거나 상관없이 당신이 보는 신문 논조를 그대로 옮겨놓은 시국설교는 넌더리난다. 차라리 신문을 여러 개를 보던가. 아니면 성경만 이야기하던가.
성경이 설교하지 않고, 성경에 설교하는 이 괴이한 현실을 월터 브루그만은 윌리엄 윌리몬에게 보낸 편지에서 ‘설교의 비상사태’라고 했다. 성경 밖의 세계로 성경이 내장하고 있는 원초적 파워를 희석시키는 것은 위급한 것이 맞다. 우리가 성경에 순종하기보다는 성경이 우리에게 순종하는 그런 류의 설교는 성경의 권위에 의문을 제기하고 강단의 위기를 초래했다. 신앙은 파국으로 치닫는다. 교회는 위난에 빠졌다.
긴급하게 대처해야 한다. 그 처방약의 하나가 바로 브루그만이고, 이 책이다. 그는 우선 설교자부터 텍스트를 먹으라고 한다. 목사는 ‘텍스트를 먹고사는 피조물’(92쪽)이다. ‘고대 문헌을 읽고 듣는 자’(3장)다. 성경의 세계를 소문내기보다는 목격하고 살아낸 증인이다. 더도 덜도 말고 딱 한명이면 족하다. 단 한명의 신실한 천국의 서기관(마 13:52)만 있으면 충분하다고 노학자는 말한다. 이 책을 읽고 내가 그 한명이 되리라 마음먹는 이들이 여럿 나올 것을 믿는다.
세상에 대한 이해도 시급하다. 더 이상 기독교 왕국이 아니다. 한 사회의 모든 사람이 기독교인이 아니다. 바벨론 포로를 방불케 한다. 기독교는 소수이다. 변방이다. 아웃사이더다. 이러한 세계에서 설교는 기득권과 우리 당대의 지배적 이념을 뒷받침하는 이데올로기여서는 안 된다. 설교는 현실에 대한 이미지를 바꾸고(1장) 세계를 다시 묘사하고(5장) 현실을 달리 해석해야 한다(10장). 진실을 말한다(11장). 그래야 세상을 바꾼다. 세상이 교회를 바꾸지 못한다.
세상을 알자고 칼 바르트는 ‘한 손에 성경을, 다른 한 손에 신문을’이라고 외쳤다. 성경으로 신문을 해석하기보다는 신문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참담한 시대에 우리의 다른 한 손에 들려야 할 것은 기독교 고유의 전통을 담아낸 독서다. 성경과 신문은 물론이고, 기독교 고전과 교회의 역사를 두루두루 읽어야 하겠다. 설교란 신앙의 전통에 깊이 뿌리박고, 그 전통을 창조한 텍스트에 깊이 젖어 들어 새로운 상상력을 발휘하여 현실을 설명하고 재구성하는 일(1장, 6장)이기 때문이다.
사람에 대한 연민이다. 설교자는 강자의 환호나 승자의 행진곡이 아니라 상처받은 자의 부르짖는 소리(7장)를 듣는다. 절박한 어려움을 호소하는 애굽에서 노예살이 하는 이스라엘, 이스라엘의 배역과 배교를 통탄하는 선지자들, 정의를 갈구하는 시편의 목소리들은 성경을 읽고 전파하는 자의 목소리가 되어야 한다. 설교자는 그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대언해야 마땅하다. 설교는 하늘의 소리인 동시에 약자와 빈자, 소수자의 목소리이어야 한다. 그것이 텍스트가 말하는 방식이다.
이 책이 설교자의 것이라면, 저자의 또 다른 작품인 ‘구약의 위대한 기도’는 일반 성도를 위한 책이다. 앞의 책이 하나님 말씀이 우리 귀에 들리게 하는 목사의 텍스트라면 뒤의 책은 우리 기도가 하나님 귀에 들리게 하는 성도의 텍스트다. 성경을 설교하고 성경으로 기도하라는 두 권이 성경의 비상사태의 한 처방책이 될 것이다. 설교의 노하우가 아니라 설교의 정신을 파악하고, 텍스트에 설교하지 않고 텍스트가 설교하는 설교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이 책은 피할 수 없다. 이 책부터 꼭꼭 씹어 먹어라.
글=김기현 목사(부산로고스교회 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