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선 목사의 시편] 무관심의 덫

입력 2012-07-24 18:01


얼마 전에 종영한 한 방송사의 드라마 마지막 회에 나오는 아버지와 딸의 대화가 마음 아팠습니다. 재벌 회장인 아버지와 가족의 비리를 파헤쳐 형부를 대통령 선거에서 떨어지게 한 기자 딸의 대화입니다. 몇 달이 될지 몇 년이 될지 모르지만 해외에 나가서 내가 누구인지, 아버지가 누구인지 생각해보고 싶다는 딸에게 아버지가 묻습니다. “내가 그리 밉나?” 그러자 딸이 “미운데, 아빠 사랑해”라고 말하며 아버지를 끌어안습니다.

도대체 무엇입니까. 사랑도 미움도 관심 있을 때 가능한 일입니다. 아무리 못된 사람도 딸에게는 아버지고 그 아버지는 관심의 대상입니다. 그러기에 미운 아버지지만 사랑해야 하는 이 복잡함. 사랑과 미움은 서로 대립되는 개념 같지만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관심’입니다. 무관심하다면 사랑도 미움도 없습니다. 관심을 떨쳐버릴 수 없기에 사랑도 하고 미워도 합니다. 그러고 보면 가장 끔찍한 상태는 ‘무관심’입니다.

당신이 무슨 짓을 하든 상관없다는 반응은 가장 슬픈 일입니다. 차라리 화라도 내면 좋으련만 아무런 관심도 받지 못하는 상태는 비참한 것이지요. 집을 나가도 찾지 않고 가구를 때려 부숴도 야단치지 않는 부모 앞에서 아들은 절망할 것입니다. 이미 아버지의 관심에서 멀어졌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는 이 세상의 부조리나 불평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차별 등에 화내지 않는지요. 사람이기를 포기한 것 같은 악한 자들을 보면서 왜 목소리를 높이지 않나요. 정상적 사고로는 이해하기 힘든 일들이 빈번한 이 세상을 보면서 왜 분노하지 않을까요.

프랑스 사회에 ‘분노 신드롬’을 일으킨 스테판 에셀의 ‘분노하라’는 책이 생각납니다. 레지스탕스였고 외교관을 지냈으며 퇴직 후에 인권과 환경 문제 등에서 활동하는 저자는 프랑스가 처한 여러 문제에 ‘분노하라’고 외칩니다. 무관심이야 말로 최악의 태도이며 인권을 위해 힘써 싸워야 한다고 호소합니다.

냉소적인 자세로 내 것만 챙기면 그만인 사람들이 나의 이해와 관계가 없으면 분노하지 않는 것은 죄입니다. 그렇게 화내며 끼어들면 나만 손해라고 도통한 사람처럼 행동합니다. 그래봐야 세상이 변하지 않는다고 학습돼 점점 무관심의 늪에 빠져 죽어갑니다. 그 사이 세상은 악한 자들이 쥐고 흔듭니다. 결국 그 부조리의 칼은 나를 향할 것이고 그때는 후회해도 소용없습니다.

악한 자들은 우리를 이런 무관심에 빠뜨리려고 합니다. 착한 사람들을 지치게 해서 무관심을 유도하고 그 뒤에 숨어 못된 짓을 합니다. 나쁜 일이 일어날 땐 화냅시다. 미워하고 분노합시다. 그래야 사랑할 자격도 있습니다. 그래야 세상에 희망이 보입니다. 당신의 건강한 미움이 세상을 바꿉니다.

(산정현교회 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