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한상인] 노출 심한 옷과 품격

입력 2012-07-24 16:52


동서고금에서 인간의 근본적인 삶의 문제는 의식주의 해결이다. 21세기의 초현대 문명 아래서도 사람들은 먹고, 입고, 거주하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고통스러워한다. 한 지역에서는 음식이 넘쳐날지라도 다른 지역에서는 굶어죽는 사람들이 무수하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지만 사람은 집이 없어 전세와 월세, 쪽방, 길거리를 전전하며 살아간다.

그런데 그런 굶주림과 생활고 중에서도 사람들은 왜 옷을 입는가. 더구나 이제 초복이 지나고 며칠 후면 중복이 다가오는데, 찌는 듯한 삼복더위에도 사람들은 왜 옷을 입는가. 옛 선비들이 즐겨 인용하던 두보의 시에 ‘늦더위에 의관을 정제하고 앉아 있자니 미칠 지경으로 고함을 지르고 싶다(束帶發狂欲大叫·속대발광욕대규)’라는 말이 있다.

남을 민망하게 하는 의상 삼가길

어쩌면 옷을 입는 것은 사회적 억압이요, 건강을 해치는 고통스러운 일일 수 있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 젊은 여성들이 노출이 심한 옷을 입고 다니면서 옷을 입는 것은 개인의 자유이며,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아마도 거의 벌거벗고 다니지 않는 이상 법에 저촉되지는 않을 것이다. 영국 역사가이며 철학자 칼라일은 의상철학에서 자연은 신의 살아 있는 의상이라고 했다. 그의 말대로라면 오늘날 온 세계의 자연이 벌거벗기고 황폐해져가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인간의 의상도 그렇게 닮아가는 것인가. 노출이 심한 현대인의 의상은 벌거벗긴 환경에 대한 표현인가, 아니면 그렇게 황폐해져가는 심성에 대한 표현인가.

성경은 놀랍게도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벌거벗고 살도록 만드셨다고 전한다. 그런데 오히려 사람이 옷을 만들어 입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은 후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으로 옷을 만들어 입은 것이다. 범죄한 후 벗은 몸이 그들에게 수치심과 두려움을 가져다준 것이다. 그러나 허겁지겁 만들어 입은 무화과 나뭇잎 옷이 적절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이 가죽옷을 지어 입혔다. 인간은 범죄함으로 인해 본래 덧입혀진 하늘의 거룩한 옷을 상실하자 자연에서 만든 옷이라도 입지 않으면 불안한 존재가 된 것이다.

이처럼 옷은 부끄러움을 가리는 것이다. 특히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들은 하체가 드러나지 않도록 옷을 입어야 했으며, 제단에 올라갈 때 몸이 노출되지 않도록 계단을 만들지 않아야 했다. 그뿐 아니라 옷은 다른 사람 앞에서 품위를 갖추기 위한 것이며 그만큼 상대방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것이다. 자기만 편하게 마음대로 옷을 입는 것은 사회의 다른 구성원들을 무시하는 행동이 될 수 있고 그들의 시선을 민망하게 만드는 것이다. 자기 마음대로 옷을 입는 것은 개성이고 자유이지만, 다른 사람을 위해 옷을 입는 것은 사회적 억압이고 속박인 것이 결코 아니다. 다윗 같은 성군도 밧세바의 목욕하는 모습을 보고 간음죄와 살인죄를 범함으로써 자신뿐만 아니라 그의 가족들까지도 처절한 고통을 겪게 되었다.

교만함 버리고 믿음의 옷 입어야

옷은 그 사람의 품격을 나타내주는 것이다. 개인의 자유와 개성미를 추구하는 현대인들일지라도 라오디게아 교회에 주신 말씀처럼 스스로 부유해서 부족함이 없다는 교만한 마음을 버리고, 믿음의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해야 한다. 아마도 천국에는 옷이 필요 없을 것이다.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로 믿음의 거룩한 옷을 입기 때문이다. 그날이 오기까지 옷은 필요악인지도 모른다.

사람은 왜 옷을 입는가? 수치를 알기 때문이다. 사람은 왜 옷을 입는가? 함께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옷은 자신의 개성일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 대한 존중과 배려인 것이다.

한상인 한세대 구약학 교수·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