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이영미] ‘철수 생각’을 듣고 나니
입력 2012-07-22 18:33
만약 2012년 7월 대한민국 유권자의 뇌 구조를 그린다면, 제일 큰 동그라미 중 하나는 ‘철수 생각’이 될 것 같다. 유력 대권 주자인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의 생각 말이다.
대중은 그에게 묻고 싶은 게 참 많다. 우선 국가관, 경제관, 대북관을 물어야 할 테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의 미래와 가계부채 대책, 대기업 규제책과 골목상권 보호에 대한 의지도 들어봐야 할 것이다.
지난 19일 출간된 안 원장의 대담집 ‘안철수의 생각’이 출간 하루 만에 초판 4만부가 팔렸다는 소식이다. 어디서는 1분에 27권, 2초에 한 권씩 팔렸다고도 한다. 일등공신은 제목이다. 모두가 궁금한 ‘철수 생각’을 들려주겠다니 반응이 열렬할 수밖에.
물론 카피의 힘만은 아니다. 책 속의 안 원장은 에두르거나 회피하지 않았고, 아픈 과거를 주워섬기지도 않았다. 과연 ‘안철수의 생각’은 대권 주자가 대중에게 내놓은 자기소개서의 혁신 사례로 기억될 만하다.
안 원장이 뿌린 매력적인 직구들은 이를테면 이런 거다. 그는 ‘왜 이건희 회장의 손자까지 공짜 밥을 먹여야 하느냐’는 선별적 복지론자의 질문에 대해 “부유층 자녀는 부모, 조부모가 이미 많이 낸 세금의 혜택을 당당히 누리는 것”이라는 논리로, 남유럽 위기를 과잉복지의 위기로 본 분석에는 “복지 지출이 많아 재정 위기를 맞았다면 북유럽이 먼저 망했어야 한다”는 팩트를 들어 반박했다. 보편 복지에 손을 들어준 발언이다.
반면 이런 주장도 했다. 진보진영 측의 재벌해체론에 대해 “공정한 룰을 세우기 위해 감시는 하되 과도하게 근본적인 접근으로는 세상을 바꾸기 어렵다”고 경계했고, 제주 강정마을의 해군기지 논란에 대해서는 “김영삼부터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정부까지 같은 결론을 내렸다면 받아들이는 게 옳다”고 말했다. 정부와 전문가에 대한 신뢰를 강조한 대목이다.
이런 주장이 독창적인가. 물론 아니다. 좌우를 넘나드는 정치적 퓨전은 기회주의로 비판받을 소지가 다분하다. 아마도 지난 대선까지는 그랬을 게다. 2012년 대선에서 안철수의 목소리는 좌우의 합리적 섹터들이 어렵게 합의해온, 그러나 정치적 양극단에 의해 공론의 장에서는 묵살됐던 중간지대 담론의 요약보고서에 가깝다.
그동안 조용히 토론해온 중간파의 소리가 ‘안철수’를 통해 표출된 것이라고 할까. 대표성이 과소 평가됐던 온건파가 안 원장을 통해 정치적 파워를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건 분명 새로운 현상이다.
안 원장의 독창성은 내용보다 어법에 있다. 그는 “∼라는 얘기가 있다”거나 “∼는 평가가 있다”는 식으로 경험과 인용, 주장과 평가를 분리했다. 지적인 정직성의 증거이자 한편으로는 대화의 가능성을 연 소통법이다.
정답의 세계에는 아군과 적군만 존재한다. 답에 이르는 과정이 논의될 때 비로소 토론은 가능해진다. 그는 자신의 지적 경로를 공개함으로써 지금 대화 제의를 한 것이다.
안 원장은 대담집을 통해 ‘출마선언→공약발표’라는 정치의 룰을 뒤집었다. 정책 밑그림을 대중에게 공개한 뒤 시민의 지지가 모인다면 한번 나서보겠다고 했다. 링 안의 선수들에게는 부당한 지름길처럼 보이겠지만 유권자에겐 손해 볼 것 없는 제안이다.
일단 지지의 한 표를 던진다. ‘철수 생각’을 듣고 나니 그를 본선 무대에서 만나고 싶어졌다.
이영미 정책기획부 차장 ym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