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웅 목사의 시편] 임마누엘

입력 2012-07-22 17:46


나에게는 ‘임마누엘’,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의미를 깊이 생각하며 실감하게 된 기회가 있었다. 예루살렘에 갔을 때였다.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기억하기 위해 세워진 홀로코스트 기념관에는 야누쉬 코르착이라는 사람의 청동 부조상이 있다. 아이들을 끌어안고 있는 그의 모습이 그곳에 남아 있다. 야누쉬 코르착의 본명은 헨리크 골드슈미트, 폴란드인으로서 의사이며 유대인 아이들을 위한 고아원과 학교를 운영했던 교육자다.

1942년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어느 날, 자신이 돌보는 고아원에 느닷없이 나치 독일군이 들이닥쳤다. 그 방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집단 학살이라는 끔찍한 운명이 아이들 앞에 있었던 것이다. 야누쉬 코르착은 군인들에게 항의했다. 항의가 통하지 않자 이번에는 애걸을 했다. ‘제발 이 아이들을 데려가지 마세요. 아이들을 살려주세요.’ 소용없었다. 결국 수많은 아이들이 군용트럭에 실려 가게 되었다. 보다 못한 코르착은 아이들과 함께 군용트럭에 올라탔다. 당신은 유대인이 아니니 내리라는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공포에 떨고 있는 아이들을 위로했다고 한다. ‘얘들아, 무서워하지 마! 우리는 지금 소풍 가는 거야.’ 예쁜 옷과 가방을 들게 한 후에 아이들과 함께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그리고는 마지막 생사의 기로에서 그는 놀라운 선택을 한다. 도저히 아이들을 홀로 죽음의 자리로 보낼 수 없었기에 그는 아이들과 ‘함께’ 죽음의 길을 선택한다. 당신을 빼주겠다는 나치 장교의 말을 그는 끝까지 거절하고, 아이들과 ‘함께’했다.

야누쉬 코르착의 삶은 실로 숭고하다. ‘함께’한다고 하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닌가? 죽음의 길을 걷는 아이들과 ‘함께’했던 그의 모습은 예수님을 생각나게 한다. 예수님도 죽음 아래 놓인 죄인들과 ‘함께’했다. 십자가는 죄인들과 ‘함께’ 죽음의 자리로 가신 자리다.

그러나 야누쉬 코르착이 흉내 낼 수 없는 것이 그 다음에 나온다. 코르착은 ‘함께’ 죽었지만, 그것으로 끝이다. 더 이상 없다. 그러나 예수님은 함께 죽으신 것으로 끝이 아니다. 결국 ‘함께’한 죄인들을 살리셨다(엡 2:5∼6). 왜일까? 예수는 죽음 아래 놓인 죄인이 아닌, 죽음을 이기는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한 죄인이 다른 죄인을 위하여 ‘함께’했던 사건이 우리에게 가슴 뭉클한 감동을 준다면, 영원하신 하나님 아들이 미물과 같은 죄인과 ‘함께’하신, ‘임마누엘’의 사건은 얼마나 더 놀랍고 위대한가? 코르착의 숭고한 사랑도 ‘임마누엘’의 사랑 앞에서는 빛을 잃어버린다. 야누쉬 코르착의 사랑 앞에서 우리가 감동을 받는다면, 임마누엘의 사랑 앞에서 우리는 통제할 수 없는 충격과 전율을 느껴야 할 것이다. 오늘따라 예수님의 이름이 ‘임마누엘’이라는 것이 자랑스럽고 감사하다.

<서울 내수동교회 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