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현의 사막의 구도자들] 라고비치(Lagovitch) 교감선생님
입력 2012-07-20 18:07
내가 살고 있는 캐나다 몬트리올은 눈이 많이 내린다.
몇 년 전 겨울에는 5m가 넘는 눈이 내렸다. 이처럼 눈이 많이 내리는 해에는 눈 녹은 물 때문에 봄에 홍수가 난다. 작년 겨울에는 눈이 거의 안 내린 편인데도 우리 집 앞뜰에는 겨울 내내 30∼40㎝의 눈이 쌓여 있었다.
초등학교 5학년인 둘째 녀석은 눈만 내리면 얼굴에 화색이 돈다.
교감 선생님의 호출
사실 강원도 산골이 고향인 나는 둘째만큼이나 눈을 좋아한다. 그런데 지난 겨울 어느 날 둘째아들이 수심 가득한 표정으로 집에 돌아왔다. 자초지종을 물으니 운동장에서 눈 때문에 3학년 아이들과 실랑이를 벌였다고 했다. 그리고 이 일로 라고비치라는 여자 교감 선생님이 엄마 아빠를 호출했다는 것이다.
교감실로 들어가자 라고비치 선생님이 반갑게 맞이하며 아들을 향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해 보라고 했다. 아들은 나름대로 두 가지를 주장했다. 친구 둘과 함께 눈으로 만들어 놓은 요새는 자기들의 것이라는 점과 따라서 자기들이 만든 것을 부수는 3학년 아이들을 힘으로 제압한 것은 정당하다는 논리였다. 교감선생님은 반대논리를 폈다. 학교 운동장에 있는 눈은 모두가 공유하는 것이지 누구의 것일 수는 없다. 또 두 살이나 어린 3학년 아이들을 힘으로 제압한 것은 타당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처벌규정도 친절하게(?) 설명했다. 하루 동안 교실 근처에는 얼씬할 수 없고 교무실 한쪽 구석의 어두침침한 책상에서 온종일 침묵하며 홀로 공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황한 아들은 아빠인 나를 쳐다보며 구원의 손길을 기다렸다. 그 순간 3학년 학생 중 한명이 교감실 밖 책상에 홀로 앉아 공부하며 근신 중인 것을 목격했다.
비폭력 정신과 정당전쟁론
나는 10명이나 되는 3학년 아이들이 먼저 시비를 건 것이 다툼의 발단이 되지 않았느냐고 라고비치 선생님에게 되물었다. 그러나 그녀는 나의 정당방위 논리를 수용하지 않았다. 3학년 학생들이 먼저 시비를 건 것은 사실이지만 그럴 경우에도 그 학생들을 손으로 밀거나 발길로 차서는 안 되고 운동장에 있는 규율담당 선생님이나 혹은 교감인 자신에게 알려야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자초지종을 조사해 교칙에 따라 처벌한다고 했다.
라고비치 선생님의 이런 설명에 아빠인 나는 내심 기뻤다. 아들이 이전에도 몇 번 동급생과 몸싸움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마다 아내는 절대로 친구들을 밀치거나 발길질을 해서는 안 된다고 단단히 일러 주었다. 그러면 아들은 “그럼 상대한테 맞고만 있느냐”고 늘 항변했다. 아빠인 나로서는 아들이 맞았다는 말에 화가 나서 “맞으면 같이 걷어차라”고 내뱉곤 했다. 목사이자 신학자인 남편의 입에서 그런 말이 불쑥 나오는 것에 아내는 어이없어했다. 나는 어거스틴도 정당전쟁론을 주장했는데 방어적으로 그깟 발길질 한번 한 것이 뭐가 문제냐고 받아치곤 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비폭력 정신(아내)과 어거스틴의 정당전쟁론(나 자신) 사이의 팽팽한 대립으로도 해결하지 못하던 이런 난제를 교감선생님이 원칙을 갖고 해결해 준다면야 얼마나 좋은가. 나는 아들을 설득하여 밀친 것과 발길질에 대해 교무실 독학이라는 ‘고독의 징계’를 달게 받도록 했다. 아울러 다시는 그런 과격한 행동을 하지 말고 혹 무슨 일이 생기면 곧장 교감실로 가서 말을 하라고 일러두었다.
사람 위에 사람 없다
휴머니즘의 바탕에서 물리적인 폭력과 언어적인 폭력을 계몽하는 라고비치 선생님의 ‘정의의 기술’을 보면서 나는 4세기 수도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상과 사욕(邪慾)을 버린 수도자들 사이에서도 다양한 문제들이 발생했다. 그리스도를 따라 살겠다고 모인 사람들 사이에서 문제가 생길 때는 어떻게 각자에게 맞는 몫을 돌려줄 것인가. 수도원에서는 순종이 중요한 덕목이었으니 아랫사람이 윗사람 말을 무조건적으로 따랐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우리는 흔히 수도원 하면 상명하복의 엄격한 질서를 가진 중세 수도원을 생각한다. 그러나 4세기 최초의 수도원인 바실리우스의 수도원은 중세의 수도원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바실리우스의 수도원 안에는 공동체 안에서 벌어지는 갈등에 대해 충분히 토론하고 대화할 수 있는 재판위원회가 있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 “죽기까지 순종해야”(빌 2:8)하는 것이 구도자의 자세지만 그것은 가르침이나 규율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부합하는 한에서 그런 것이었다. 만약 성경의 가르침에서 벗어나는 것을 요구하거나 행할 경우에는 설령 수도원장이라 할지라도 재판위원회에 회부돼 성경의 원리에 비추어 가르침을 받고 징계를 받아야 했다. 그리스도인들이 모여서 성경말씀에 따라 살려고 만든 공동체이니 성경이 판단의 원리가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리라.
휴머니즘이 원리이든 성경말씀이 원리이든 결국 우리가 지향하는 사회는 사람이 살기 좋은 사회다. 사람 밑에 사람 없고 사람 위에 사람 없는 그런 사회야말로 사막의 구도자들이 만들고자 했던 이상향이었다.
<한영신학대 교수·캐나다 몬트리올대 초청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