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말다툼도 학생부에 ‘빨간줄’ 공부 잘하면 눈감아주고… ‘고무줄’ 학폭위

입력 2012-07-19 19:17


학교폭력대책자치위원회(학폭위)가 학교에 따라, 사안에 따라, 처리 방식과 기준이 현격히 다른 경우가 많아 형평성과 신뢰성을 잃었다는 지적이 잇따르고 있다. 특히 교육과학기술부가 학교폭력 연루자에 대해 입시에서 불이익을 주는 방침을 정한 이후 학폭위 결정에 대한 반발이 행정소송 등 법적분쟁으로 이어지는 경우마저 생겨나고 있다. 학폭위는 학교 폭력이 일어났을 경우 징계를 논의하고 결정하는 학교별 자치기구다.

서울 강남의 모 중학교 2학년생 A양(14) 등 4명은 지난 14일 오후 열린 학폭위에서 징계 처분을 받았다. 같은 학급에 재학 중인 B군(14)에게 ‘심각한 언어폭력을 행사했다’는 게 이유였다. 그러나 A양은 “B군이 친구의 안경을 밟아 부러뜨리고도 ‘돈으로 물어주면 될 것 아니냐’며 사과하지 않는 모습에 화가 나 ‘사과하라’고 여러 차례 말했던 것뿐”이라고 항변했다. A양은 “끝까지 사과하지 않는 B가 얄미워 결국 욕설을 한 번 내뱉은 것은 사실이지만 마치 심각한 학교폭력범으로 몰린 것 같아 억울하다”고 말했다.

A양에 대한 징계는 비교적 가벼운 ‘사회봉사’로 결론났다. 문제는 이 때문에 생활기록부에 학교폭력 연루자로 기재되게 됐다.

A양의 부모는 “다른 학교의 경우 형사처벌에 해당할 정도로 심각한 폭력이 발생했을 경우에만 (생활기록부에) 폭력 사실을 기재하는 것으로 안다”며 “동급생끼리의 말다툼 때문에 생활기록부에 ‘주홍글씨’가 새겨지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고 반발했다. A양 부모는 다음 주 중 서울시교육청에 행정심판을 제기하기로 했다.

서울의 다른 중학교에서는 올해 초 학폭위에서 의결된 사항이 학교 측 요구에 의해 변경되는 경우가 발생했다. 이 학교 3학년 학생 C군(15)을 지속적으로 괴롭혀 문제가 된 D군(15)이 특목고를 지망하는 성적 우수생이란 이유에서였다. D군은 당시 열린 학폭위에서 학부모 위원들의 만장일치로 ‘사회봉사’ 판정을 받았지만, 학교 측이 “사회봉사는 생활기록부 출결사항에 기재가 돼 곤란하다”고 반대했고 결국 징계수위가 낮아져 ‘학교봉사’ 처분으로 달라졌다.

이 같은 혼란은 정부가 학폭위의 역할을 대폭 강화하면서도 학폭위의 운영기준과 처리방식에 대한 통일된 지침을 마련하지 않은 데서 생겼다는 지적이다. 경기도 용인의 한 고등학교에서 학폭위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학부모 김모(45·여)씨는 “대부분 학부모로 이뤄진 학폭위(9인의 위원 중 과반수가 학부모)는 전문성이 부족하기 때문에 수사기관처럼 사실관계를 정확히 파악하고 판단하는 데 한계가 있다”며 “특히 자녀를 키우고 있는 학부모들의 경우 가해학생의 미래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결정에 소극적이기 마련”이라고 설명했다.

참교육을위한전국학부모회 관계자는 “학폭위에 대한 정부 차원의 가이드라인이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학폭위가 징계만을 위한 기구로 운영되고 있는 것은 문제”라며 “학폭위를 열어야 하는 사안의 명확한 기준부터 적정한 징계 수위, 징계 이전 선결돼야 하는 과정 등 명확한 지침이 먼저 마련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도경 김수현 기자 siempr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