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차정식] 빚진 세대의 불우한 초상

입력 2012-07-19 18:36


가계부채 1000조원 돌파를 기점으로 나라가 온통 근심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있다. 막대한 공공부채까지 보태진 마이너스 경제를 청산할 일이 까마득해진다. 상상하기조차 힘든 이런 천문학적 액수의 돈을 빌려다 쓰게 된 내력은 구구각색이다. 주택 구입 및 소규모 창업을 위한 대출이 큰 몫을 차지하고, 젊은 세대의 경우 학자금 및 생계비 대출의 부담도 큰 축에 속한다. 부동산투기 열풍과 연동된 불량한 탐욕의 후유증이 부채공화국의 증상을 악화시킨 혐의도 배제할 수 없다.

점증하는 빚의 무게에 깔려 신용이 불량해지면 가계부채의 독성은 당사자들을 마침내 ‘파산’이라는 벼랑 끝으로 내몬다. 언론에서는 이러한 심각한 빚잔치의 위기를 ‘폭탄 돌리기’에 비유하며 다급한 논조로 정부기관과 금융권, 채무자들 사이의 위태로운 게임을 예언하고 있다.

무거운 짐에서 ‘사랑의 빚’으로

성경은 빚의 문제를 복합적인 관점에서 접근한다. 이자를 취하면서 돈을 빌려주는 대부행위, 인간 생명이나 생활의 기본 터전인 토지를 저당 잡으면서 채무자를 압박하는 빚 독촉 행위 등에 대해 성경은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런가 하면 극단적인 궁핍의 상황에 처한 이웃에 대한 채무의 변제 및 탕감은 하나님의 관대한 은혜의 메시지로 곧잘 강조된다.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를 가르쳤을 때 그 ‘죄’는 다름 아닌 인간의 사회경제적 삶의 현장에 터를 둔 ‘채무’를 의미했다. 신학적으로 보면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에 생명 자체를 빚진 자들이다. 꼭 물질적인 채무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부모와 형제, 친구와 이웃, 공동체의 여러 성원들에게 다양한 빚을 지면서 살고 있다.

그러나 그 빚은 아무런 조건 없이 융통되는 사랑의 빚이어야 한다. 물론 그것이 빚진 자의 자기정당화를 위한 변명의 근거가 될 수는 없다. 빚진 자에게 그것을 갚기 위한 각고의 노력이 동반돼야 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자산 증식의 차원에서 부채의 필연성을 부추기거나 은행 빚 떼어먹지 못하는 자들의 무능력에 대한 냉소적 풍조가 도덕적 해이를 심화시키는 현실 속에서 빚은 은혜의 매개가 아닌 저주의 무덤이 될 수도 있다.

나쁜 부채에서 빨리 벗어나야

빚진 세대의 초상은 아무리 밝게 조명해도 불우하게 비친다. 그렇다고 나쁜 채무의 현실에 마냥 탄식만 하며 ‘부채공화국’의 태만을 방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경기 활성화라는 명목으로 안달하는 정부의 부채 중심적 경제정책은 오늘의 갈증에 매여 내일을 포기하는 무책임한 처사이다. 금융권도 제 조직의 단기적 이득을 위해 돈 빌려갈 사람들을 포획하려는 데만 혈안이 돼서는 안 된다.

가장 중요한 결단의 핵심층은 이미 무거운 빚을 진 자들과 앞으로 빚을 지게 될 미래의 채무자들이다. 돈을 빌려주는 결정도 신중해야 하지만 쉽게 돈을 빌려 방만하게 경영함으로써 빚더미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개인과 공동체의 치열한 각성이 절실하다.

학창시절 지인에게 용돈을 얼마 빌려준 뒤 받지 못한 적이 있었다. 워낙 빠듯한 자취생 살림인지라 그로 인해 끼니를 조금 걸러야 했지만 내 구차한 사정을 드러내는 것이 싫어 갚으란 얘길 꺼낼 수 없었다. 그래도 그때 한 가지 독한 결심을 했는데 앞으로 남에게 돈을 빌리지 않겠다는 것과 그냥 얼마 나눠주더라도 감당 못할 액수를 빌려주지도 않겠다는 것이었다.

남의 재물에 기대어 빚지고 산다는 것은 삶의 주체에 대한 얼마나 심각한 모독인가. 그러나 동시에 남의 도움을 철저히 외면한 채 빚지지 않고 산다는 것은 얼마나 가혹한 일인가. 이 두 곡절 사이의 긴장 가운데 빚진 세대의 진정한 소망이 자생해야 하지 않을까.

차정식 한일장신대 신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