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길] ‘천자문 읽어주는 책’ 펴낸 김환기씨 “검은 하늘·누런 땅엔 심오한 철학 담겨”
입력 2012-07-19 18:22
“하늘은 검지 않고 땅은 누렇지 않은데, 첫날부터 하늘은 검고 땅은 누르다고 하니 천자문 공부가 영 재미없습니다.”
‘천자문’은 조선시대 어린이들의 한문 교육 입문서다. 한문이 생활문자였던 그 시대에도 어렵기는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던 모양. 조선 후기 실학자 정약용은 학동들의 이런 불평이 일리가 있다며 어린이 학습서로 적절치 않음을 주장한 바 있다.
‘천자문 읽어주는 책’(일월담)의 저자 김환기(43)씨도 이에 공감한다. 그는 18일 국민일보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중국 남조 양나라 주흥사가 하룻밤 사이 지었다는 설이 있는 천자문은 중국의 역사와 지리를 바탕으로 하고, 무엇보다 심오한 동양철학을 깔고 있다”며 “그 맥락을 모르면 여간 이해하기 어려운 게 아니다”고 말했다. “그래서 한글세대와는 더욱 멀어진 천자문의 해설서가 절실하지만 마땅한 책이 없어 나서게 됐다”고 했다. 동양철학을 이해하는데 이만한 입문서가 없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충남 공주 출신인 저자는 동네 훈장 할아버지를 둔 덕분에 한글보다 한문을 먼저 깨쳤다. 이것이 끈이 돼 전문저술가로 활동하면서 5년 전부터 논어, 주역, 당시(唐詩) 등 동양고전을 두루 읽어왔다.
그의 친절한 해설을 보자. 조선시대 학동이 의문을 제기했던 바로 그 첫 문장, 천지현황(天地玄黃). 하늘은 검고 땅은 누르다는 이 구절의 타당성을 저자는 중국의 지리적 특수성으로 설명한다. 중국의 고대국가들은 남북방향이 아니라 동서방향으로 왔다갔다하며 명멸했다. 문명을 유지하기 위해 황하와 떨어져서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땅이 누르다는 것은 자명한 진리다. ‘하늘이 검다’ 역시 하루의 절반인 밤의 하늘은 검지 않은가.
“검다는 뜻으로 ‘흑(黑)’이 아니라 ‘현(玄)’을 쓴 것은 나아가 철학사상까지 담고 있어 더욱 심오하지요.” 즉 하늘은 현묘하다는 뜻까지 포함하는데, 이는 하늘의 가시적 상태를 말하는 게 아니라 그 성격에 대한 철학적 규정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의 천자문 강독은 중국 역사까지 종횡무진이다. ‘추위양국(推位讓國) 유우도당(有虞陶唐)’. 자리를 밀어주어 나라를 양보하니, 유우(순임금)와 도당(요임금)이다. 바로 요순시대의 순조로운 권력이양을 말하는 것으로 이들은 맏아들에게 왕위를 넘기지 않았다. 천자의 지위는 단순 세습되어서는 안 되며 하늘의 도를 인간세상에서 구현할 수 있는 능력 있는 자에게 물려줘야 한다는 철학까지 담고 있다.
이런 이유로 조선 영조시대 홍성원이 쓴 천자문 해설서는 이 부문을 의도적으로 소홀히 다룬다고 지적한다. “요임금이 아들 단주가 불초하므로 순에게 양위하였고, 순의 아들 상균이 불초하므로 하나라 우왕에게 양위하였으니.”(115쪽)
책의 돋보이는 점은 분류에 있다. 천자문은 모두 1000개의 글자로 된 장편시(詩). 네 글자를 한 구로 삼고, 두 구를 한 문장으로 해서 총 125개의 문장으로 돼 있다. 이 책도 전체를 순서대로 소개하지만 단순 나열하지 않는다. 천자문을 깊이 들여다본 저자는 이것이 비슷한 주제끼리 스토리텔링처럼 이어지고 있음을 발견한 것이다.
책은 ‘검은 하늘 누런 땅의 비밀’ ‘역사의 회오리’ ‘사람의 길’ ‘군자의 길’ ‘중국의 지리와 역사’ ‘벼슬살이와 인생’ ‘행복한 가정의 조건’ ‘중국을 빛낸 10대 걸출 인물’ 등으로 나뉘어 있다. 그래서 지루하게 순서대로 읽는 게 아니라 골라 읽는 맛도 있다.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