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정글의 법칙’ 이지원 PD “난 지도만 줄뿐 모든 건 ‘병만족 몫’ 그게 ‘정법’이죠”
입력 2012-07-18 18:14
이 남자는 정글에 중독됐다. 예컨대 휴대전화를 들어 보이더니 그는 이렇게 말한다.
“전 지금 인터뷰를 하면서도 머릿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어요. ‘어디서 전화가 오기로 했는데 왜 안 올까’ ‘내일은 뭘 해야 하는데’…. 그런데 정글에 가면 이런 생각이 전부 없어져요. 뭘 먹을지만 고민하게 되죠. 머리와 마음이 청소가 되는 기분이에요.”
이 남자는 바로 SBS ‘김병만의 정글의 법칙’(정법) 이지원(38) PD다. 그는 서울에서 태어나 ‘8학군’에서 10대를 보내고 명문대에 진학, 2000년 SBS에 입사한 천생 ‘도시남자’. 하지만 지난 12일 서울 목동 SBS 사옥에서 만났을 때 그의 ‘정글 예찬론’은 끝이 없었다.
“밤이 되면 하늘에 별이 수만개인데, 별이 그냥 떠있는 게 아니에요. 눈앞에 쏟아져요. 그런 하늘을 보면 중독될 수밖에 없어요. 출연진이나 제작진도 ‘다시는 이 프로그램 안 하겠다’고 하다가 촬영 마지막 날이 되면 ‘다음엔 어디 갈 거냐’고 물어요(웃음).”
그의 말을 듣고 있자니 당장 오지의 호젓한 자연 속으로 떠나고 싶어졌다. 하지만 브라운관을 통해 본 ‘정법’을 떠올리니 순간의 부러움은 순식간에 가셨다. ‘정법’은 코미디언 김병만을 필두로 ‘병만족(族)’으로 통하는 연예인들의 정글 생존기를 담아내는 예능 프로그램. 매주 시청률이 20%에 육박할 만큼 인기를 끌고 있지만 출연진의 고생이 안방에서도 느껴질 만큼 혹독하고 처절한 예능이다.
출연진은 살기 위해 뱀을 잡아먹는가 하면 애벌레나 박쥐 고기도 마다하지 않는다. 원시 부족을 만나러 기나긴 정글을 통과할 땐 40도를 웃도는 더위에 녹초가 된다. 심지어 맨손으로 직접 불을 피우기 위해 8시간 동안 사투를 벌이기도 한다. 이날 이 PD를 만난 건 카메라 뒤에 숨겨져 있을, 정글의 밤하늘에 뜬 별처럼 많았을 고생담을 직접 들어보고 싶어서였다.
-방송을 보면 아찔한 상황이 너무 많다.
“우리의 모토가 있다. ‘우리가 자연을 존중하면 자연도 우릴 존중한다.’ 어떤 분들은 저희가 ‘도전’한다고 하는데 저희는 절대 도전이란 단어를 쓰지 않는다. 겸손한 마음으로 자연에 다가간다. 절대 무리하지 않는다.”
-출연진을 극단적 상황에 내몬다는 인상을 받을 때가 많다.
“그렇게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된다. 방송에도 나왔지만, 가장 위험한 순간을 맞았던 건 병만족이 아니라 바로 나다. (왼쪽 팔에 남은 동전 크기의 상처를 보여주며) 평생 흉터로 남을 것 같다. 주변 사람들에겐 ‘자연 문신’을 하나 새겼다고 말하고 다닌다(이 PD는 지난 5월 방영된 ‘바누아투’ 편에서 병만족과 동승한 배가 갑작스런 파도에 전복돼 팔에 부상을 입었다).”
-날씨와 해충, 음식 등 촬영에 힘든 점이 많을 텐데, 제작진을 가장 힘들게 하는 건 뭔가.
“잠을 제대로 못 자는 게 힘들다. 수면이 부족하면 사람이 멍해지지 않나. 스태프는 텐트를 치고 자는데, 습하고 더워서 텐트가 의미가 없다. 나무로 지은 병만족 집이 텐트보다 훨씬 좋다.”
‘정법’은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프로그램이다. 제작진과 출연진이 원시의 땅에서 3주 정도 동고동락한다는 포맷은 언젠가부터 예능의 ‘대세’가 돼버린 리얼 버라이어티의 끝을 보여준다. 대본은 없고, 카메라는 병만족이 오지의 삶에 적응해가는 모습을 담는 데 집중한다.
이런 프로그램에서 과연 PD의 역할은 무엇일까. 이 PD의 ‘정법’ 연출론은 지난 4일 그가 트위터에 남긴 글에서 확인할 수 있다. ‘리얼리티쇼의 연출은 바둑과 같다. 프로 9단은 상대를 훈수하지 않지만 결국 자신의 의도대로 판을 리드한다. 자연스럽게 (하지만 머릿속으론 치밀하게) ‘분위기를 조성’ 하는 것이 진정한 고수의 연출이다. 각본 없는 드라마는 그때 나온다.’
-트위터에 남긴 글이 인상적이었다.
“이렇게 표현하고 싶다. ‘정법’에 대본은 없지만 맵(Map·지도)은 있다고. 지도는 길을 알려주지만 무엇을 하라고 강요하진 않는다. PD로서 하는 일도 비슷하다.”
-촬영지를 선택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뭔가.
“그곳에 살고 있는 부족이다. 자연경관이 수려하다고 가진 않는다. 순수성을 간직한 부족을 소개하고 싶다. 문화의 다양성, 상대성에 대한 관심이 예전부터 많았다.”
-제작진과 출연진이 오랜 시간 함께하는 만큼 관계가 남다를 것 같다.
“현장에선 절대 ‘○○씨’ ‘○○○PD’라고 부르지 않는다. 호칭은 그냥 형이고 누나이고 동생이다. 촬영이 힘든 만큼 똘똘 뭉치지 않으면 버텨낼 수가 없다.”
-김병만의 존재가 절대적이다. 함께 일하면서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첫 촬영지였던 나미비아 ‘악어섬’에서 병만이와 리키김이 의견 차이로 충돌하고, 병만이가 인터뷰를 요청하는 제작진에게 짜증을 냈던 일이 있다. 고민 끝에 그 장면들을 모두 내보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 모두 전파를 타버리니 병만이가 내게 화를 많이 냈다. 그때 조금만 더 방송을 지켜봐 달라고 부탁했다. 때론 가감 없이 모든 걸 내보낼 때 방송이 더 나아질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 사이에 더할 수 없는 신뢰가 생겨난 것 같다.”
시베리아에 이은 촬영지로는 ‘아프리카의 소행성’ 마다가스카르가 낙점됐다. 이 PD와 병만족은 19일 마다가스카르로 떠난다. 5번째 촬영지로 마다가스카르를 택한 이유를 묻자 “그곳에만 존재하는 희귀동물이 7500종이나 된다. 여기까지만 말씀드리겠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는 현재 새로운 ‘예능의 법칙’을 만들어가고 있는 듯하다.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