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회심-22년째 재소자 사역 박효심 목사] ‘담장안 사람들’ 섬김은 살리신 하나님께 효도하는 길
입력 2012-07-18 18:28
고난은 변장된 축복이라는 말을 믿는다. 고통을 감내하기까지 견디기 힘들어도 그 과정에서 인생의 또 다른 사명을 발견하곤 하니까.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길, 내가 갈 길은 아닐 거라고 여겼던 길들이 어느 순간 명확한 사명의 대로(大路)로 떠오르기도 한다. 내가 살아온 길이 그런 것 같다.
효도 효(孝)에 마음 심(心). 부모에게 효도하라고 아버지가 지어주신 내 이름은 ‘박효심’이다. 회갑의 나이를 넘기고 보니 내가 평생 효도할 대상은 ‘아, 하나님이었구나’라는 걸 깨닫는다. 그리고 하나님은 내게 특별히 ‘담장 안의 사람들(재소자)’을 섬김의 대상으로 맡기신 것 같다. 벌써 22년째지만 지금도 교도소를 방문하는 날이면 즐겁고 설레고 떨린다. 내가 만약 병에 걸리지 않았더라면 과연 이런 삶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을까.
1987년 4월이었다. 병원에서 편도선 수술을 마친 뒤에 의사가 불렀다. 목 앞쪽에 종양이 있다고 했다. 후두암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3개월 정도입니다. 차분히 준비하세요.” 중환자도 아닌 말기암 환자로 ‘사형선고’를 받는 순간이었다.
그때 나이 37세. 당시 서울 독산동 성광감리교회에 출석하던 나는 전도에 열심이었다. 몸이 아프거나 형편이 어려운 성도들은 그냥 못 보고 넘어갈 정도로 나름 착하다고 칭찬받는 집사였다. ‘그런 내가 왜 이런 일을 당할까’ 하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동시에 ‘꼭 살아야겠다’는 의지가 샘솟았다. 벼랑 끝 기도가 시작된 것은 그때부터다. “하나님, 한번만 살려주세요. 살려주시면 죽을 때까지 주의 일을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내 기도를 들어주셨다. 5년 만에 암세포는 깨끗이 사라졌다. 그리고 투병 과정 가운데 새로운 소명을 발견했다. 신학을 공부해서 복음을 전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1994년 신학교에 입학해 공부를 시작하면서 ‘교정선교’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동료 중에 교도관이 있어서 교정선교 사역에 참여하면서부터다. 처음에는 그리 탐탁지 않았다. ‘하나님, 왜 하필이면 여자인 내가 무섭고 힘든 곳을 찾아가 선교를 해야 하나요.’ 그런 나에게 하나님이 주신 말씀은 ‘네가 나에게 받은 은혜가 크지 않느냐’였다. 머리를 한대 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래. 당장 죽을 목숨을 하나님이 살려 주셨지. 나는 빚진 자다. 그 사랑에 보답하기로 하나님께 약속하지 않았던가.’
문득 돌아보니 교정선교가 나에게 낯선 일만은 아니었다. 이전에 다니던 교회에서도 교정 선교팀이 있었고 때때로 동참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재소자들에게 면회 가고 편지 쓰고, 영치금도 주면서 함께 기도하고 위로하며 용기를 주는 일이었다. 이런 일들을 미리 맛보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이 밀려왔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당시가 내 인생의 변곡점이었다.
그때 그 마음이 지금까지 교도소와 구치소를 들락날락하도록 만들고 있다.
교정선교는 ‘90분의 기적’이라고 비유하고 싶다. 일주일이나 한 달에 한 번씩, 교도소를 방문해 성경 말씀을 전하고 재소자들과 함께 기도한 뒤 교도소 문을 나서는데 대략 1시간30분 정도 걸린다. 그 짧은 시간에 한 사람을 변화시킨다는 건 어려운 일이자 어쩌면 교만한 일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그 만남의 시간들이 계속 더해지면서 하나님께서 그분들의 영혼을 만져주시면 얘기는 달라진다. 나는 매번 체험한다. 하나님을 모르던 분이 성경을 읽기 시작하고, 세례를 받고, 은혜 받은 성경 구절을 편지에 써서 함께 나눌 때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행복감을 맛본다. 90분의 만남이 쌓이고 쌓여서 기적을 만드는 것이다. ‘아, 하나님이 이런 기쁨을 주시려고 나를 이곳에 보내셨구나.’
재소자들을 만날 때 꼭 지키는 철칙이 있다. 먼저 내 마음의 문을 여는 것. 나는 설교를 위해 단상 앞에 서자마자 하는 일이 있다. 먼저 재소자들을 향해 손을 흔들며 큰 목소리로 “보고 싶었어요. 여러분” 하고 활짝 웃는다. 그러면 그들도 함께 손을 흔들며 마음의 문을 살짝 열어준다. 그래야 내 얘기가, 설교말씀이 그 문틈으로 조금씩 들어간다. 그들은 갇힌 자들이다. 늘 불안한 마음이 하루에도 수십 번씩 요동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설교는 소망과 희망을 주제로 한 메시지가 주를 이룬다.
내 마음을 비우는 것도 중요하다. 내가 그들을 어떻게 변화시키겠다는 마음은 금물이다. 가식과 교만한 마음도 내려놔야 한다. 그래야 그들이 다가오니까. 또 있다. 그들의 죄목을 묻지 않는 것. 그들의 죄목을 아는 순간, 나도 인간인지라 선입견이 생기게 마련이다. 그래서 스스로 얘기하지 않는 이상 알려고 해선 안 된다. 그저 아들·딸과 똑같이 대하는 마음으로 온 마음으로 품어주는 게 내가 해야 할 일이다.
20년 넘게 교도소를 다니다보니 많은 일을 겪는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재소자가 있어 주위에서 아는 사람인가 싶었더니 몇 년 전 다른 지방 교도소에서 마주쳤던 재소자였다. 출소했다가 또다시 죄를 지어 교도소로 들어온 것이다. 한두 번 겪은 일이 아니기에 그리 이상할 것도 없지만 그때마다 교정선교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몸소 느낀다. 그들 마음속에 복음의 씨앗이 심겨지고 싹이 트고 열매 맺을 때까지 내 자식 돌보듯 돌보고 또 돌봐야 한다는 걸.
나는 어디서 말을 할 때면 내 옆에 꼭 물 한잔이 있어야 한다. 후두암 치료 후유증으로 침샘이 막혀 늘 입이 마른 상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건 아무것도 아니다. 22년 동안 나는 차도 없이 전국의 교도소를 누비고 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다음 주에 어느 지역 교도소를 방문한다고 하면 차량부터 섭외해야 한다. 15명 정도 되는 선교팀이 함께 움직이려면 승합차가 꼭 필요한데, 매번 여기 저기 수소문해서 차를 구해 다녀오고 있다. 차를 구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를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차가 없어 때로는 왕복 10시간씩 고속버스를 타고 오갈 때도 있지만 결코 피곤함이 선교의 보람을 이기지 못한다. 하나님께서 언젠가 승합차를 주시리라 믿고 열심히 기도 중이다.
지난달 중순이었다. 암투병 시절, 나를 위해 기도해 준 조영준(성광감리교회 원로) 목사님이 청송 3교도소를 함께 방문해 나 대신 설교를 해주셨다. 예배를 마치고 상경하는 길에 조 목사님이 한마디 건네셨다. “그때 3개월밖에 못 살 거라던 여집사가 목사가 되어서 이렇게 귀한 사역을 20년 넘게 하고 있다니…. 기특해요, 박 목사.” 나는 속으로 말했다. ‘모두 다 하나님의 솜씨입니다.’
정리=박재찬 기자 jeep@kmib.co.kr
박효심 목사
1950년 광주광역시에서 출생했다. 94년 예장합동 중앙 총회신학교를 마치고 99년 4월 목사 안수를 받았다. 서울 신정동 은혜교회 담임 및 은혜교정선교회 회장직을 맡고 있다. 법무부 청송3교도소 종교위원으로 21년째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