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人터뷰] 월 50만원만 벌어 20만원 기부하는 산골 시인 “혼자 살지만 홀로 살지는 않는다”

입력 2012-07-17 18:39


지리산자락서 자족의 삶 사는 박남준 시인

박남준(55) 시인은 경남 하동군 악양면 동매리의 산자락에서 혼자 산다. “2003년 9월에 지인이 소개해준 빈 집에 살러왔는데 해가 길어서 참 좋았다. 이사 온 다음날 개울에서 빨래를 했는데 점심 무렵에 보니까 고슬고슬하게 다 말라 있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점심을 해먹고 또 빨래를 했더니 저녁 무렵에 또 다 말라 있었다. 전에 살던 곳에는 하루에 한 번 다 마르기도 힘들었는데 이곳은 하루에 두 번 빨래가 가능한 곳이었다. 그 후 한 달 동안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꺼내놓고 빨래를 하며 살았다. 햇볕이 좋은 곳이다. 그 햇볕 아래서 과하지 않도록, 욕심 부리지 않도록 살고 있다.”

만난 사람=임순만 논설실장

지난 초봄 박 시인의 시집 ‘적막’을 읽고 우리에게도 이런 자연의 시인이 있다는 걸 알았다. 지리산을 배경으로 섬진강의 넓은 들판이 바라보이는 하동 악양이라면 작가 박경리 ‘토지’의 무대인 평사리가 떠오르는 곳이다. 산 밑 마을에서 자연과의 조화로운 삶을 꿈꾸며 살아가는 시인이라니 가깝게는 나가노 북알프스를 마주하고 평생 은둔의 삶을 살아가는 일본 작가 무라야마 겐지(1943∼ )를 떠올리게 하고, 멀리는 ‘월든’의 작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1818∼1862)나 ‘희망’의 작가 스콧 니어링(1883∼1983)을 연상케 한다. 도시문명과 거리를 두고 산과 들에서 자급자족하며 최소한을 추구하되, 자기의 가치를 잃지 않는다는 점에서 방식은 약간씩 다르더라도 대체적으로 같아 보인다.

홀로 사는 세상의 ‘적막’을 토로하는 시집이라면 슬픔이나 넋두리가 많을 줄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시는 그렇지 않았다. 깨끗하게 마른 뼈대가 올곧게 서 있었고, 가끔은 지울 수 없는 사랑이 펄럭거리고 있었다. 시집 판권에는 9쇄 발행이라고 되어 있었다. 그를 읽는 사람이 꽤 된다는 이야기다.

“밀린 빨래를 한다 금세 날이 꾸무럭거린다/ 내미는 해 노루꽁지만하다/ 소한대한 추위 다 지나갔지만/ 빨래 줄에 널기가 무섭게/ 버쩍버쩍 뼈를 곧추세운다/ 세상에 뼈없는 것들 어디있으랴/ 얼었다 녹았다 겨울 빨래는 말라간다/ 삶도 때로는 그러하리”(시 ‘겨울 풍경’ 부분)

그를 얼마 전 서울 서교동 인문까페 창비에서 만났다.

-서울에 온 이유는?

“한 단체에서 강의를 하게 됐다. 생태적 삶에 대해서 얘기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악양 산 밑의 외딴집에서 혼자 사는 이유는 무엇인가.

“대학을 졸업하고 1988년 KBS에 입사해 다큐멘터리 작가생활을 했다. 작가생활 1년을 넘기니까 힘이 들고 재충전이 필요할 것 같아 회사의 허락을 얻어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쉬게 됐다. 금요일 밤에 전주로 내려가 주말을 보내고 올라오는 생활이었다. 그러다 전주에 한 문화센터가 생기는데 관장 일을 맡아 달라는 제의가 들어왔다. 곧바로 KBS를 퇴사하고 3분의 1도 안 되는 봉급에 만족하며 전주 변두리 모악산 밑 빈 집에서 생활을 했다. 그런 어느 날 돈 없이도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이마저도 그만두고 자급자족하며 사는 생활을 시작했다.”

-돈 벌지 않고 사는 삶이 가능한가.

“처음에는 많이 힘들었다. 모악산 밑의 빈 집을 고쳐 사는 것이라서 지붕이 백결 노인의 누더기 옷처럼 방수재로 여기저기를 덮어씌운 것이었다. 어느 날 한 지인이 만약에 지붕을 고친다면 어떤 것이 좋겠냐고 물어온 일이 있었다. 마침 ‘뜨거운 양철 지붕위의 고양이’라는 T 윌리엄스의 희곡이 생각 나 양철지붕이라고 했더니 며칠 집을 비운 사이 정말 양철지붕으로 개조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양철지붕은 한여름에 바짝 달구어지면 참을 수 없을 만큼 더웠다. 어느 날 소낙비가 양철지붕을 드세게 두드릴 때 마당에 나가 아이처럼 뛰어놀다가 알몸으로 누워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많이 흔들렸고 눈물도 많았던 것 같다. 알몸으로 소나기를 전부 받아들이며 마음을 굳게 먹었다. 굳세게 살자고, 과하지 않게 살자고.”

-시집에 보면 혼자 밥 먹는 일의 사무침을 말하는 것이 있던데.

“전에도 어떤 계획을 세워서 일을 추진한다기보다 즉흥적으로 실행하는 경향이 강했다. 봉급을 받을 때도 돈을 지갑에 넣지 않고 봉투째로 주머니에 넣고 한 장 한 장 꺼내 쓰는 식이었다. 어느 날 쌀이 떨어져 단식을 하기로 했다. 주머니에는 얼마간의 돈이 있었지만 책을 사기로 한 돈이었다. 책을 사러 시내로 나갔다가 허기를 자극하는 짜장면 냄새를 맡고 짜장면 집 앞을 여러 차례 배회했다. 결국 유혹을 이기고 책을 샀는데 그런 경우가 되풀이되곤 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내린 결론이 있다. 자존심을 지키면서 살 정도의 최소한의 경제활동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어느 정도를 생각했나.

“1992년이었다. 곰곰이 따져보니 10만원 정도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넉넉하게 잡아 20만원을 계획했다. 텃밭을 가꾸고 나무를 해다 때는 생활이니까 가능했다.”

-지금은 얼마의 돈이 있어야 한 달을 살 수 있나.

“월 50만원을 잡고 있다. 글을 쓰고 강의를 하면서 50만원을 마련한다. 그 돈에서 기아대책이나 도시빈민학교에도 조금 돈을 보낸다. 약 15만원에서 20만원은 약자를 위해 일하는 곳에 돈을 보내준다.”

-50만원을 벌어서 20만원을 기부한다는 말인가.

“그 정도로 생활이 가능하다.”

-미래 걱정은 하지 않는가. 당장 아프다면?

“연전에 단식을 하고 있을 때 산모퉁이를 산책한 적이 있었다. 7월 땡볕에 한 할머니가 산비탈 밭에서 콩밭을 매고 있었다. 기력이 없어 도와드릴 수도 없고 해서 할머니를 에둘러 산을 내려왔는데 다음날 이장이 마을 방송을 통해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전했다. 그 할머니가 집으로 돌아와 깨끗하게 옷을 갈아입고 주무시다가 돌아가신 것이었다. 그런데 툇마루 기둥에 고무줄로 묶어놓은 것이 있었다. 100여만원이 든 저금통장과 목도장이었다. 아무런 연고가 없었던 할머니였다. 그 돈으로 마을 사람들이 할머니를 산비탈 밭에 모셨다. 그 일을 겪고 깨달은 바가 있다.”

-깨달은 것이라면?

“할머니 장례 후 마을 사람들이 할머니의 살림을 정리하며 쓸 만한 물건은 가져가라고 했다. 나는 놋수저를 하나 가져와 누룽지 긁는 숟가락으로 사용하다 나중에는 닳아져서 방문 빗장쇠로 사용했다. 어느 날 빗장쇠 수저가 부러져 던져 버린 적이 있었다. 다음해 툇마루에 앉아 겨울 해바라기를 하는데 잔설 속에서 반짝이는 것이 있었다. 바로 그 놋수저였다. 그 놋수저를 보면서 할머니의 저금통장을 생각했고, 나도 언젠가는 죽을 텐데 나를 치워줄 사람들을 위해 관 값이라도 저축해 놓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장례비를 얼마로 생각했나.

“할머니는 100만원이었지만 나는 아는 사람이 조금 더 많아 200만원을 생각했다. 그 돈을 1년 조금 넘게 걸쳐 저금할 수 있었다. 돌아가는 길에 지인들에게 폐를 끼칠 수야 없는 것이 아닌가.”

-시 데뷔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 달라.

“대학 3학년 가을쯤 조태일 시인이 발행인으로 있는 ‘시인’지에 시를 투고를 했더니 얼마 후 ‘시인정신’에 관해 20장 분량의 산문을 보내라는 연락이 왔다. 그런 과정을 거쳐 시인으로 데뷔를 했지만 당시 쓴 산문은 게재되지 않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시로는 먹고살 수 없기 때문에 산문을 어느 정도 쓰는지 알아보려고 했다는 것이었다. 산문 실력이라도 있으면 먹고살 수는 있으니 데뷔시키고, 그렇지 못하면 데뷔를 시키지 않겠다는 의도였다고 한다. 그때(1984년) 조태일 시인이 당부한 말이 있다. 앞으로 노동시나 농민시 같은 현실참여시가 유행일 텐데 그런 조류에 휩쓸리지 말고 꾸준히 너의 시를 쓰라는 것이었다. 그 말을 깊이 받아들였고, 지금도 나만의 시를 쓰려고 노력하고 있다.”

-혼자 살면서 배운 것은 무엇인가.

“겨우내 신고 다니던 털신을 나무를 쌓아둔 헛간의 벽 위에 올려놓았는데 그 털신 속에 딱새가 둥지를 틀고 있는 것을 보고 딱새가 떠나갈까봐 한동안 나무를 가지러 가지 못했다. 해가 훤할 때는 주위의 삭정이들을 주워 불을 붙였지만, 밖에 나갔다가 늦게 돌아오는 날엔 불을 지피지 못하고 찬방에서 잠을 잤다. 개울 건너 청딱따구리가 오동나무 구멍에 둥지를 틀고 살 때는 개울에 세수를 하러 갈 때도 청딱따구리의 눈치를 살펴야 했다. 혼자 살지만 홀로 살지는 않는다. 홀로 사는 삶에는 평화가 없다.”

박 시인과의 대화는 그 이후로도 많이 이어졌지만 기사는 여기서 마무리하려 한다. 그를 이 지면에 소개하는 것은 물질에 현혹당하지 않는 그의 맑은 심성 때문이다. 지금 한국 사회에 들끓고 있는 모든 갈등은 더 많이 가지려는 것이 원인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그런 투쟁에는 관심 없이 자존감을 잃지 않고 사는 시인. 그런 이들이 때로 우리에게 힘이 된다. 반성의 힘 말이다. 그의 시 한 편을 소개한다.

“그 사람 얼굴을 떠올리네/ 초저녁 분꽃 향내가 문을 열고 밀려오네/ 그 사람 이름을 불러보네/ 문밖은 이내 적막강산/ 가만히 불러보는 이름만으로도/ 이렇게 가슴이 뜨겁고 아플 수가 있다니”(‘이름 부르는 일’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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