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 인문학] 냄비 땜장이에서 영국 최고의 크리스천 작가가 된 존 버니언 (中)
입력 2012-07-16 21:00
“그리스도가 흘리신 피로 용서받지 못할 죄는 없다”
치안판사 윈게이트는 원래 존 버니언이 사형당하거나 구속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직원을 보내 회유하기로 했다. 직원은 비국교도 모임이 왕에 대한 음모에 이용될 수 있으니, 불법 집회에서 설교를 그만두라고 존 버니언을 설득했다. 그러나 존 버니언의 대답은 단호했다.
“어떤 기회가 주어지더라도 설교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법이오!”
결국 치안판사 윈게이트가 직접 나섰다. 윈게이트는 존 버니언에게 국교회의 예배를 따르고, 불법집회에서 설교하지 않는다고 서약하면, 당장 석방시켜 주겠다고 제안했다. 이번에도 그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오늘 당신이 나를 석방한다면, 내일 다시 설교할 것입니다.”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치안판사 윈게이트는 존 버니언을 재판에 회부했다. 존 버니언은 종신형을 선고 받았다. 그의 두 번째 아내 엘리자베스는 남편을 구명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용기 있게 치안 판사를 찾아가 재심을 요청했다. 존 버니언의 첫 번째 아내는 네 명의 아이들을 남기고 1656년 사망했다. 엘리자베스는 존 버니언과 1659년에 결혼했다. 엘리자베스의 탄원이 있었지만 재판부는 탄원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존 버니언이 석방되면 곧바로 설교를 하겠다고 천명했기 때문이었다. 재판부로서는 재범 우려가 확실한 확신범을 풀어 줄 수 없었다.
그가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영국의 종교적 상황은 날로 나빠졌다. 찰스 2세는 왕정에 복귀할 때 장로교도들의 도움을 받았지만, 곧 장로교회를 폐지하고 주교를 임명하면서 영국 국교회의 감독 주의를 확산시켰다. 수많은 청교도들과 독립파 교도들이 반역죄로 기소되었다. 존 밀턴은 눈이 먼 덕택에 가까스로 형벌을 면했다. 1664년에 찰스 1세는 ‘제1집회령’을 내려 5인 이상 모여 예배하는 자를 처벌하도록 했고 1665년에는 ‘5마일령’을 내려 비국교도 목사가 이전에 목회하던 장소에서 5마일 이내의 지역에서 살 수 없도록 했다.
존 버니언은 1666년에 몇 주 동안 잠깐 풀려 난 것을 빼고는 1672년까지 12년 동안 옥살이를 했다. 다행히 수감 생활은 관대한 편이었다. 수감 생활 동안 ‘신발 레이스’를 만들어 팔아 가족을 부양할 수 있었다. 또한 허락을 받아 친구나 가족을 만났다. 때로는 바깥의 집회에도 참석할 수 있었다. 그는 감옥에서 같은 죄수들을 상대로 설교를 했다. 그는 수감 생활 동안 성경과 조지 폭스의 ‘순교자 열전’을 열심히 읽었다. 그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새기면서 ‘순교자 열전’을 통해서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 순교자들로부터 위로와 용기를 받았을 것이다. 관대하다고 해도 수감생활은 어디까지나 수감생활이었다. 그는 가족들과 떨어져 수감생활을 하는 것을 뼈에서 살을 발라내는 것처럼 아파했다. 그러나 수감생활이 그에게 고통만 준 것은 아니었다. 그 속에서 그는 하나님을 새롭게 만났다고 고백했다.
“나는 평생에, 수감생활을 한 때만큼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이해한 적이 없었다. 전에는 그저 그런 줄로만 알고 지나쳤던 구절들이 이곳에서는 확연하게 다가왔다. 이때만큼 예수 그리스도를 실제적이고 뚜렷하게 생각하며 산 적이 없었다. 이곳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보고 느끼며 지냈다.”
존 버니언은 수감생활 동안 새롭게 깨달은 것을 바깥의 사람들에게 설교할 수 없었다. 그는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게 글로써 설교를 하기로 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넘치는 은혜를 알리기 위해 자신의 회심을 담은 영적 자서전을 집필하기로 했다. 그는 구속되기 전에 이미 두 권의 책 ‘공개된 몇 가지 복음의 진리들’(1656)과 ‘공개된 몇 가지 복음의 진리들의 옹호’(1657)를 출간해서 사람들의 주목을 받은 바가 있었다. 영적 자서전의 제목은 ‘죄인 괴수에게 넘치는 은혜’였다. 제목이 보여주듯 그는 사도 바울처럼 ‘죄인 괴수’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넘치는 은혜를 받아 회심의 삶을 살게 된 것을 솔직하고 담담한 필치로 서술하고 있다. 1666년에 출판한 ‘죄인 괴수에게 넘치는 은혜’는 11개의 장과 마지막 결론으로 이루어져 있다. 책의 내용은 회심 이전과 회심 그리고 회심 이후의 삶 이렇게 3단계로 볼 수 있다. 책 속에서 그는 회심 이전에 자신이 죄에 빠져 지내던 모습을 적나라하게 고백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저주와 맹세와 거짓말과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모독하는 일에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온갖 부류의 불경한 친구들이 끊일 날이 없었다. 육체의 정욕과 열매가 나 같은 가련한 영혼을 꼼짝 못하게 장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죄에 빠져 지내던 존 버니언은 어느 날 한 환상을 보게 되고 회심을 결심하게 되었다. 그가 본 환상은 어떤 신자들이 높은 산의 양지 바른 곳에 모여 앉아 따사로운 햇볕을 즐기고 있는데 그 자신은 추운 곳에서 서리와 눈과 먹구름에 잔뜩 움츠린 채 떨고 있는 환상이었다. 그와 신자들 사이에는 담장이 놓여 있었는데 그 담장은 산 전체를 두르고 있었다. 그는 담장을 넘어 따뜻한 양지 바른 곳으로 가려했지만 들어 갈 곳이 없었다. 그러다가 마침 좁은 틈을 발견했는데 틈이 너무 좁았다. 좁은 틈으로 들어가기 위해 여러 번 시도했지만 실패만 거듭했다. 거의 탈진 상태가 되어 겨우 몸을 집어넣어 가까스로 들어 갈 수 있었다. 존 버니언은 자신이 보았던 환상의 의미를 깨달았다. 그 산은 하나님의 교회였고, 담장은 하나님과 세상을 분리하는 장벽이었고 그 틈은 예수 그리스도였다.
이 환상의 의미를 깨닫고 그는 회심을 했다. 그러나 회심 이후에도 시험과 시련은 끝나지 않았다. 항상 다시 옛 생활로 돌아가고자 하는 시험과 유혹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는 시험과 유혹의 물결에 휩쓸려 죄를 짓는 것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리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그로 인해 흘린 그리스도의 피가 용서하지 못할 죄라는 것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수감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이 항상 내 곁에 계시며 사탄이 나를 괴롭히려고 할 때에도 늘 나와 함께하신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수감 생활 12년 만에 존 버니언은 자유의 몸이 되었다. 1672년 찰스 2세는 ‘신앙 자유령’을 선언하면서 비국교도들에 대한 관용정책을 폈다. 그러나 그것은 청교도나 독립파를 위한 생각으로 그런 것이 아니었다. 가톨릭의 부활을 꾀하기 위한 것이었다. 존 버니언이 풀려나기 전부터 베드퍼드 공동체는 그를 목사로 선출해 놓았다. 새로운 집회장소도 물색해 놓았다. 그 해 5월 존 버니언은 25명의 다른 비국교도파 목사들과 함께 베드퍼드셔와 주변 마을들에서 설교하도록 허락받았다. 사람들은 그를 ‘주교 버니언’이라 불렀다. 별명이기는 하지만 주교라고 불릴 만큼 그는 설교와 목회 활동에 뛰어났다. 예상한 대로 찰스 2세의 ‘신앙 자유령’은 오래 가지 못했다. 찰스 2세는 1675년에 ‘신앙 자유령’을 철회하였다. 존 버니언은 불법적인 설교를 했다는 이유로 또 다시 구금되었다.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