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현의 사막의 구도자들] 옷 잘 입는 사람이 성공한다

입력 2012-07-13 18:26

언젠가 TV 의류 광고에 ‘옷 잘 입는 남자가 성공한다’는 멘트가 등장한 적이 있다.

오래전의 이야기이지만 좋지 않은 내 기억 속에 그 멘트가 생생한 것을 보면 매출의 증감에 관계없이 그 광고는 심리적 성공을 거두지 않았나 싶다.

패션은 자존감을 잉태한다?

그런 류의 광고는 그냥 우연히 등장한 것이 아닐 것이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유명 백화점 신입사원으로 입사, 잘 나가는 친구가 있었다. 친구는 산뜻한 넥타이에 깔끔한 와이셔츠를 받쳐 입고 출근해 직장 상사 앞에 서면 자신감도 생기고 뿌듯한 느낌이라고 했다. 만약 그렇지 않고 좀 후줄근한 셔츠에 별 특징 없는 넥타이를 하면 직장상사 앞에서 왠지 자신이 초라하고 작아 보인다 했다.

이렇게 자존감을 잉태하는 신묘(神妙)한 코디네이션으로 옷을 입던 친구는 승승장구했다. ‘옷 잘 입는 남자가 성공한다’는 멘트는 그런 인물군(群)의 공감된 경험에서 녹아 나온 것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깨끗하고 단정한 외모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단아한 인간상의 외적 기준으로 인식됐다. 하지만 ‘옷을 단정하게 입어야 한다’거나 혹은 ‘옷을 깨끗하게 입어야 한다’는 인류 복식 문화의 일반 기준조차 헌신짝처럼 내던져버렸던 자들이 있으니, 곧 사막의 구도자들이었다.

이집트 사막 수도자들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안토니우스는 120세로 세상을 떠날 때에 겉옷으로 입던 가죽 옷을 한 벌 남겼다. 전기 작가는 안토니우스가 그 옷을 약 100년 동안 입으면서 ‘적어도 한 번’ 빨았다고 써 놓았다. 세탁을 잘 안했으니 냄새가 얼마나 고약했을까. 그리스도의 도를 닦던 자들은 옷을 ‘깨끗하게’ 혹은 ‘단정하게’ 입는 것은 허례허식이자 가식으로 보았다. 그 이유는 겉모양을 번드르르하게 장식하면 할수록 속마음이 악하고 몹쓸 것에 지배받는다고 생각한 때문이었다. 그래서 수도자들은 치장이나 외모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오로지 어떻게 자신의 내적 동요(pathos)를 제거하여 고요와 평정(apatheia)에 이를 수 있을까에 몰두했다.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370년 프랑스의 남부 도시 투르(Tours)에서 있었던 주교(감독 혹은 노회장) 선출에서는 ‘외모에 무심하라’(마 11:8 참조)는 사막의 지혜가 민심을 움직였다. 젊은 시절부터 그리스도를 따라 살기 위해 노력한 마르티누스(Martinus)라는 자가 투르에 살았다. 투르의 사람들은 마르티누스의 덕에 매료돼 그를 투르 교회의 감독으로 세우려고 했으나 감독 선출권을 갖고 있던 이웃 도시의 감독들은 극렬하게 반대했다. 이유는 마르티누스가 노숙인처럼 ‘초라한 몰골에 더러운 옷과 헝클어진 머리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자주 금식했으니 피골이 상접해 모양새가 말이 아닌 것은 당연했다. 그리스도가 겪으신 십자가의 고초를 생각한다면 온탕에 들어가 따스한 물의 촉감을 피부로 만끽하는 것은 가당치 않은 것이었다. 아울러 옷을 세탁하거나 머리를 감고 손질하여 뽐내는 것은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무의미한 행동이었다.

옷을 자랑하는 자들이여…

우리는 어땠을까. 노숙자 몰골을 한 마르티누스를 선택했을까.

그러나 현자는 현자를 알아보는 법. 권력을 가진 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투르의 시민들은 마르티누스를 뽑았다. 이는 그의 지저분한 외모를 주목한 것이 아니라 내면세계에 녹아 있는 정신의 기품과 영적인 깊이를 흠모한 때문이었다.

프랑스에서 공부를 할 때 나는 4세기 그리스도인들의 흉내라도 좀 내어 보겠다 해서 원칙을 세웠다.

그중의 하나가 여름·겨울 정장 각 한 벌과 한 켤레의 구두로만 살아가겠다는 것이었다. 이런 맹랑한 도전은 “다만 신발은 신되, 옷은 두벌 가지지 말라고” 하신 말씀(막 6:9, 눅 3:11 참조)을 받든 4세기 기독교인들을 따라 해 보겠다는 결심에서였다. 이 원칙을 내심 뿌듯해하던 어느 날 내 꼴을 보다 못한 아내가 씩 웃으면서 하는 말이 한 켤레 구두에 그렇게 뿌듯할 것 같으면 여러 켤레 구두를 갖고 뿌듯해하지 않는 것이 더 낫겠다고 일침을 주었다. 이후 서울의 여름 날씨에 비오듯 흐르는 땀에 옷이 절어 여름 양복을 한 벌 더 장만해야 했고 이곳 캐나다에 와서는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는 추위에 두툼한 겨울 정장 두 벌 외에도 가죽 코트를 더 갖추었다. 이렇게 해서 나의 각오는 해프닝으로 일단락됐다.

스스로는 우스꽝스러운 촌극을 연출하는 데에 그쳤지만 그토록 외양에 무심했던 4세기 신앙인들의 그 우직함에서 우리가 무엇인가를 배워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지나친 것일까. ‘개콘’의 ‘용감한 녀석들’처럼 용감하게 한마디 하는 것을 용서하시라. (옷이 많다고 뿌듯해 하는 자들, 옷이 좋다고 뽐내는 자들, 옷이 얼마라고 자랑하는 자들, 당신들, 부끄러운 줄 아시오)

<한영신학대 교수·캐나다 몬트리올대 초청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