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메이커 이 사람!] 불법사찰 폭로 장진수씨… ‘권력의 바위’에 ‘진실의 계란’을 던졌다

입력 2012-07-13 20:52


공무원이 꿈이던 산골 소년이 철도 기능직 10급 공무원으로 시작해 주경야독하며 7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 국무총리실에서 과장 진급을 위해 누구보다 상명하복에 충실했고, 그 성실함을 인정받아 ‘특별한 곳’으로 스카우트됐다. ‘빅 브라더(Big Brother)’의 작은 나사 역할 노릇을 했지만 주말이면 동네 사람들과 사회인 야구를 했고, 두 딸을 둔 ‘딸 바보’ 장진수(41)씨. 무엇이 그를 소시민에서 반정부 인사로 변하게 만든 것일까.

“2년 전 오늘이요? 배달사고 냈었죠. 현금 3000만원이 든 쇼핑백을 민간인 사찰 사건 수임한 변호사한테 전달하는데 5만원이 비어서 몇 번이나 다시 세느라 고생했죠.”

지난 6일 민간인 불법 사찰 폭로의 주인공 장진수 주무관을 광화문 정부중앙청사 인근 한 식당에서 만났다. 지난해 1월 점심이나 한번 먹자며 알게 된 지 1년6개월째. 그동안 진실을 세상에 알리자고 몇 번씩 설득했지만 그때마다 “아직은 공무원 신분”이라며 주저하던 그가 마음을 바꿔 먹은 이유가 뭘까.

장 주무관은 2010년 9월 민간인 사찰 증거물을 없앤 혐의(증거인멸)로 기소돼 1, 2심에서 모두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벌금형 이상의 형이 확정되면 공무원 자격이 박탈되지만 아직 대법원 판결이 남아있어 2년 가까이 대기발령 상태다.



경북 문경의 산골마을. 아버지는 명필이라는 이유 하나로 쉰이 가까운 나이에 면서기 격인 비공식 공무원이 됐다. 아들은 아버지의 못다 이룬 꿈을 이루고 싶었다. 어려운 가정 형편에 군 제대 후 복학생 시절인 1999년 최종학력 고졸 자격으로 철도청 10급 기능직에 합격했다. 그는 강원도 정선역에서 철로 통신망을 고치며 ‘24시간 근무 24시간 휴식’에 맞춰 살았다. 고된 날들이었지만 같은 고향 출신 여성과 결혼해 아이도 둘 낳고 ‘사무직’ 공무원이 되기 위해 영어사전을 작업복 뒷주머니에 항상 넣고 다녔다.

2004년 12월. 5년의 노력 끝에 7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 총리실 발령을 받자 고향에서는 ‘진수가 크게 출세했다’는 소문도 돌았다. 그는 5년6개월의 총리실 근무기간 중 2번 차출됐다. 노무현 대통령 임기 말 당시 1년, 그리고 민간인 사찰이 자행된 현 정부에서 1년.

“노무현 정부 때 있다가 1년반 만에 다시 가보니 ‘사직동 팀(김대중 정부 시절 청와대 하명을 받아 불법 사찰을 했다는 의혹을 받다 해체)’이 돼 있더라고요.”

장 주무관은 노무현 정부 시절은 100만원 뒷돈을 받은 공무원을 잡아오면 어르고 달래도 30만원 받았다는 자백서를 받기도 힘들었지만, 현 정부 들어서는 ‘털어서 먼지 안 나는 놈 없다’ 식으로 공무원, 민간인 할 것 없이 누구든 찍으면 보낼 수 있다는 분위기였다고 털어놨다. 1년이란 짧은 기간이었지만 현 정부에서 벌어지는 불법 사찰 행위를 그는 수없이 목도했고 암묵적으로 거기에 동조했다.

“그땐 제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만 피해보지 않으면 된다는 이기적인 생각도 있었죠.”

그래서인지 그는 자신이 국가 권력에 ‘당했을 때’도 혹시나 하는 기대를 놓지 않았다. 2년 전 이맘때 그는 청와대로부터 ‘대포폰’을 받은 뒤 공직윤리지원관실의 컴퓨터 하드를 이레이징(삭제)하라는 상관의 지시에 따라 움직였다.

“그분들이 저에게 ‘괜찮다’고 했지만 자기들끼리는 그게 괜찮지 않은 일이라는 걸 그때도 알고 있었던 거죠.”

졸지에 공무원에서 범법자가 되자 마음이 급해졌다. 기소된 뒤 곧바로 3000만원을 대출받아 동향 출신이 대표로 있는 대형 로펌에 찾아갔다. 진실을 털어놨지만 돌아온 건 변론 거부. 권재진 청와대 민정수석(현 법무부 장관)과 친구여서 이 사건을 맡을 수 없다는 이유였다. 그때부터 그는 국가 권력의 무서움을 실감했고, 타협점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입막음 대가성 돈 봉투, 민간기업 자리 알선이라는 반대급부가 돌아왔다.

“흔들리지 않았냐고요? 하루에도 열 번씩 마음이 바뀌었죠. 와이프랑 저랑 자꾸 방구석에 놔둔 쇼핑백에 눈이 가더라고요.”

그 유혹을 이기고 진실을 밝힌 것에 대해 그는 두 딸에 대한 아비로서의 떳떳함도 있었지만 자신을 한번 속인 ‘윗선’을 또 믿을 수 없었던 게 가장 큰 이유였다고 고백했다.

그는 그것을 ‘배신감’이란 단어로 표현했다. 자기가 믿고 따랐던 상관의 배신, 말단 공무원 하나 희생양 삼는 건 일도 아니라는 식의 조직 논리가 떠오를 때마다 새벽까지 잠을 이루지 못한 날들이 많았다고 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비 오는 골목길에서 사진을 찍기 위해 쭈뼛쭈뼛 포즈를 취하는 장 주무관을 구경하던 옆 식당 주인아주머니가 그에게 소리쳤다. “왜 이리 어색해. 웃으면 어떻게 해.”

“어떻게 아세요?”(기자)

“잘 알지. 이 바닥에서 장사가 몇 년짼데. 참 착한 사람이었는데 누가 저 사람 9시 뉴스에 나오게 한거야?”

이성규 기자 zhibag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