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애란 (4) 1974년, 10세 어린 삶 무너뜨린 ‘양강도 추방’

입력 2012-07-12 18:39


남한에 와서 힘든 노동일을 하고 변변한 직장도 없이 몇 개월을 힘들게 지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평양 대동강변 ㄱ자형 아파트에서 풍족하게 보낸 어린 시절이 생각나곤 했다. 아무 걱정 없이 지낸 평양 생활. 나는 몇 개월만 있으면 평양 외국어대학 특설반에서 외국어를 배우며 이후에는 동시 통역사가 되는 꿈을 꾸던 철없는 공주였다.

당시 아버지는 조선체육지도위원회에서, 어머니는 평양맥주공장에서 근무하셨다. 학교에서 써 내라고 하는 가계표의 부모 당별란에 ‘조선로동당원’이라고 써 넣을 수 있는 늘 당당한 아이였다. 다른 아이들에게 식량을 주고 책으로 바꿀 정도로 풍족하게 살았던 기억이 난다. 적어도 낯선 사람들이 저녁 밥상에 둘러앉은 우리 집에 뛰어들어 이삿짐을 싼다고 야단법석을 치기 전까지는 말이다.

“이용운 동무 있소.” 낯선 남자들이 아버지를 찾았다.

“정치보위부에서 왔소. 용운 동무가 이번에 당의 신임으로 사회주의 대 건설에 진출하게 되었소.”

“예, 대건설이라니요.”

“….”

“어디로 가는 겁니까.”

겁에 질린 어머니가 재차 묻자 신분증을 꺼내 보인 그 사람은 아주 냉정하게 잘라 말했다.

“어디는 알아서 무엇하겠소. 수령님을 모시고 사는 주체 조국에서 어디에 간들 무슨 상관이 있소.” “그래도 어디로 가는지는 알고 가야 않겠어요.”

“우리도 구체적인 것은 알 수 없소. 다만 양강도 내 채취 공업 부문으로 이번에 용운 동무가 진출하게 된 것이오. 수령님과 당이 아파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용운 동무가 어렵고 힘든 부문으로 가게 된 것이오.” “아니, 양강도라니요. 전 못 갑니다. 아니 안 갑니다.”

깜짝 놀란 어머니가 갑자기 눈물을 쏟으며 소리쳤다.

“아니, 이 아주머니가 왜 이래, 정신 나갔어.”

“당의 방침인데 뭐야, 동무 당원 아니야. 당원이 당의 방침을 가지고 흥정하면 되갔어.”

그 사람은 단번에 어머니를 밀치며 소리 질렀다. 하지만 어머니는 막무가내였다. “전 못 갑니다. 저 이혼해 주세요.” 어머니가 그 사람 앞에 엎어지며 울부짖었다.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아버지는 아무 말씀도 못하셨다. 한쪽 구석에 죄인같이 앉아서 애꿎은 담배만 피웠다. 어머니의 갑작스런 울음에 저녁을 먹고 있던 동생들이 겁에 질려 동시에 울음을 터트렸다. 평온하던 집안은 갑자기 아수라장이 됐다. 그때 내 나이 10살, 1974년 9월의 어느 날 일이다.

나는 그때 이혼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다. 무슨 뜻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어머니의 울부짖음과 아버지의 까맣게 된 얼굴 표정을 통해 우리 집에 심상치 않은 일이 발생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사람들은 4명의 장정들과 함께 빈 쌀가마니에 새끼줄과 수화물을 부칠 수 있는 꼬리표(명찰)까지 준비해 가지고 왔다. 어머니의 울부짖음에도 그들은 사정없이 짐을 싸기 시작했다. 여느 때보다 일찍 들어오신 어머니, 자상하신 아버지와 함께 맛있게 구운 뱀장어 반찬 때문에 오랜만에 행복에 젖었던 우리 집의 저녁 밥상은 이렇게 뒤죽박죽이 됐다.

이렇게 우리 가족은 평양을 떠났다. 그리고 오랫동안 그 땅에 갈 수 없었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과 영원히 만나지 못했다. 나는 어머니의 통곡하는 눈물의 의미를 알 수 없었다. 추방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깨닫기엔 너무 어린 나이였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우리 아버지와 가족의 죄목은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6·25 때 월남했다는 것이었다. 출신성분이 나빠졌기 때문에 평양에서 추방당한 것이다. ‘정치적 반동’이라는 딱지와 아이들의 놀림. 태어나서 처음 겪는 배고픔과 추위와 힘든 노동. 나는 어린 나이임에도 ‘이것이 악몽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정리=유영대 기자 ydyo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