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신창호] MB식 정치와 ‘3차원적 권력’
입력 2012-07-12 18:42
현 정부 들어 청와대와 부처 간 관계는 이전 정권에 비해 상명하복의 색깔이 더 짙어졌다는 평가가 많다. 아직도 청와대 핵심 참모들이 “정책은 우리가, 집행은 정부가”라는 말을 입에 달고 있는 것을 봐도 그렇다.
청와대의 ‘막강 파워’는 친박근혜계 장악 이전까지 여당과의 관계에서도 잘 나타났다.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시절 친이명박계 지도부는 청와대가 내민 정책에 대해서는 야당과 몸싸움을 벌여서라도 관철시키는 악역을 맡을 정도였다.
그랬던 청와대가 지난주엔 확연하게 ‘한풀 꺾인’ 모습을 보였다. 한·일 정보보호협정 밀실처리 논란이 벌어지자 외교통상부 고위 당국자가 당당하게 “그건 다 청와대가 시켜서 한 일”이라고 말했고, 부랴부랴 수습에 나선 청와대는 주무부처 장관이 아니라 김태효 대외전략기획관에게 책임을 물었다. 이 바람에 ‘MB(이명박) 외교안보 정책의 황태자’라고 불리던 김 전 기획관은 옷을 벗어야 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협정 체결을 둘러싸고 여야 정치권의 공세가 시작되자 집권 이후 거의 처음으로 “정부도 정무적 판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지난주 국무회의에서는 “(부처가) 정책을 발표하기 전에 정무적 판단이 필요한 사안에 대해선 청와대와 총리실에 미리 보고하라”고 했다가, 지난 9일 수석비서관회의에서는 “국내외 불필요한 논란이 있을 만한 정책은 결정 단계에서부터 부처끼리 협의하고 청와대·총리실과 상의해 국민 신뢰를 떨어뜨리지 않도록 해 달라”고 말한 것이다.
1년 전이었다면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들이 청와대와 정부 내부에서 벌어졌던 셈이다.
이 대통령은 재임기간 내내 ‘여의도 정치’로부터 될 수 있으면 멀찌감치 떨어져 있으려 했다. 기존 정치권을 당리당략과 정치공세를 일삼는 세력으로 봤기 때문이다. 여의도 정치에 대한 대통령의 반감은 “정당정치의 틈바구니에 끼여 정부가 해야 할 일을 방기하지 않겠다”는 좋은 취지에서 출발했다는 게 정설이다. 하지만 중요한 순간마다 이 반감은 정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혐오증 형태로 작동했다. “우리 정책이 맞다”는 확신이 너무도 강해, 이에 반대하는 정치권을 설득하는 일은 불필요한 절차쯤으로 여겼던 적이 많았다는 것이다.
미국의 정치학자 스티븐 룩스는 동서고금의 정치권력을 세 가지 진화 단계로 분류했다. 맨 먼저 등장하는 1차원적 권력은 ‘맨주먹 결투’식 힘의 관계로, 길 가다 부딪혀 시비가 붙은 두 사람이 치고받다가 한 사람이 이길 때 생겨나는 폭력적 지배 형식이다. 2차원적 권력은 싸움하면 처벌받는다는 규범 때문에 사람들이 서로 싸우지 못하는 힘의 관계, 즉 경찰국가 같은 형태다. 마지막으로 3차원적 권력은 싸움의 당사자이면서도 싸워야 할 이유를 전혀 못 느낄 정도로 서로 상대방을 배려하는 단계다.
정치는 1·2차원적 권력에서는 기껏해야 억압이거나 권모술수이었을 뿐이고, 3차원적 권력에 와서야 비로소 긍정성을 획득하게 됐다고 한다. 설득과 타협으로 상대방을 이해시켜 스스로도 더 넓은 지평을 얻는 민주주의 정치가 바로 그것이다.
지난 4년반 동안 ‘MB식 정치’는 어느 단계에서의 정치였는지 모르겠다. 임기 6개월여를 남겨두고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레임덕(임기말 권력누수) 현상을 보면 ‘3차원적 권력’ 단계의 정치는 아니었다는 느낌이 든다.
신창호 정치부 차장 proco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