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사의 풍경] 김수영의 여인들

입력 2012-07-12 18:46


‘첫 사랑’ 고인숙 찾아 동경 기숙사까지 간 로맨티시스트

나와 가극단 여배우와의 사랑’. 이 로맨틱한 제목은 시인 김수영(1921∼1968)이 잡지 ‘청춘(靑春)’ 1954년 2월호에 게재한 산문이다. 서두는 이렇다. “가극단 구경이 좋아서 저속한 노래와 춤과 값싼 경음악 같은 것을 들으러 따라다닌 시절이 나에게는 있었다. 그런 구경을 다닐 때는 반드시 P라는 화가와 같이 갔던 것이다. 벌써 지금부터 6, 7년 전 일이니까 나의 취미와 생활은 지금보다도 훨씬 더 낭만적이었고 열정적이었고 동시에 무질서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6, 7년 전의 일이라고 했으니, 산문에서 재현된 시대는 1947년에서 1948년 사이의 어느 때일 것이다. 이 시기에 김수영은 주로 간판화 그리기와 통역 일에 종사했으니, 그의 본격적 문단 생활이라고 할 수 있는 ‘신시론(新詩論)’ 동인 활동 직전의 일이요, 1950년 4월 여섯 살 연하인 이화여대 출신의 김현경과 결혼하기 전의 일이다.

“P가 이성숙을 사랑하듯이 나도 어느 댄서를 하나 선택하여야 하겠다고 비장한 결심을 하고 화살을 겨눈 것이 장선방이라는 어깨와 허리가 고무풍선같이 탄력이 있어 보이며 검은 눈동자에 말할 수 없는 비애와 향수와 청춘이 교향악을 부르고 있는, 나이 불과 열일곱이나 열아홉밖에는 되어 보이지 않는 아름다운 여자. 편지를 주고 같이 차를 마시고 본견 양말을 프레전트하고… 등등의 수속을 걸쳐서 나는 정식으로 이 여자와 결혼할 것을 결심하고 어머니에게 이야기하였다. 날을 받아서 나는 어머니한테 그 여자의 집을 찾아가서 장래의 나의 장모될 사람 만나보기를 탄원하였다.”

P는 본명이 박준경(朴準敬)인 화가 박일영(朴一英)을 말한다. 김수영은 당시 자신보다 나이가 열두어 살 많은 박일영을 따라 간판을 그리느라 줄곧 페인트 묻은 작업복을 입고 돌아다녔다. 하지만 김수영의 어머니는 어느 날 장선방의 어머니를 집으로 찾아갔다가 어깨가 축 늘어져 귀가해 아들을 꾸짖는다.

“그 여자의 어머니의 말을 들으니 장선방에게는 벌써 5년 전부터 약혼한 것이나 다름없는 사나이가 있다 하며 그 사람은 현재 ○○가극단에 있는 트럼본을 부는 악사이며, 그 사나이는 장선방을 친누이같이 제자같이 혹은 애인같이 손에 길이 들도록 한 가극단 안에서 한 솥의 밥을 먹고 자라났다고 한다. ‘공연히 고기 세 근만 손해가 났다! 얘!’ 하고 어머니는 일이 성사되지 않은 것도 그러하려니와 사 가지고 간 고기가 더 아까운 눈치였다.”

김수영은 자신의 순애보가 단박에 어그러지고 말았지만 어머니의 말을 듣고도 그리 슬픈 마음이 들지 않았다며 이렇게 회고했다. “P에 대한 나의 애정에 비하면 장선방에 대한 감정이란 일종의 사치같은 것이었다.”

김수영을 스쳐간 인연은 장선방 말고도 여럿이다. ‘나와 가극단 여배우와의 사랑’에 앞서 쓴 산문 ‘낙타과음(駱駝過飮)’(1953년 12월)에 등장하는 B양은 그의 글에 직접 등장하는 첫 여인이다. “B양의 생각이 난다. B양이 어저께 무슨 까닭으로 참석하지 않았는가? 그러고 보니 나는 어제 억병이 된 취중에도 B양을 보러 갔던가? 그렇다면 이렇게 이 외떨어진 다방에 고독하게 앉아서 넋 없이 글을 쓰고 있는 것도 B양에 대한 그리움이 시키는 것일지도 모른다.”

김수영은 어제의 과음을 두고 “뼈가 말신말신하도록 술을 마시지 않으면 아니 된 것도 B양이 오지 않은 외로움에 못 이겨 무의식중에 저지른 일종의 발악”이라고 잇고 있다. 여기서 ‘B양’이 누구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리고 김수영 생애에서 그리 중요한 여인이었다고 보기도 힘들다.

하지만 글 말미에 적은 ‘낙타산’(지금의 서울 대학로 뒤편 낙산) 관련 부분은 매우 중요하다. 김수영이 생애에서 가장 먼저 인연을 맺은 한 여인이 호출되고 있기 때문이다. “낙타산은 나와는 인연이 두터운 곳이다. 낙타산 밑에서 사귄 소녀가 있었다. 나는 그 소녀를 따라서 지금으로부터 약 십오 년 전에 동경으로 갔었다. 내가 동경으로 가서 얼마 아니 되어 그 여자는 서울로 다시 돌아왔고, 내가 오랜 방랑을 끝마치고 서울로 돌아왔을 때 그는 미국으로 가버렸다. 지금 그 여자는 미국 태평양 연안의 어느 대도시에서 결혼생활을 하고 있으며, 영원히 이곳에는 돌아오지 않겠다는 편지가 그의 오빠에게로 왔다 한다. 나와 그 여자의 오빠와는 죽마지우이다.”(‘낙타과음’)

유성호 한양대 국문학과 교수는 “김수영이 낙타산 밑에서 사귀었고 청년 시절 동경까지 따라가게 했던 그 여인의 이름은 고인숙”이라고 지적했다. 김수영의 친구이자 나중에 이화여대 교수가 되는 고광호의 누이동생이다. 고인숙은 경성여고보(경기여고 전신)를 나와 오빠를 따라 동경으로 가서 동경여자전문대학에 들어간다. 그녀를 따라 동경으로 간 김수영은 동경여전 기숙사까지 가서 고인숙을 만나려 했지만, 그녀는 냉정하게 거절한다. 김수영은 생애 내내 여러 여성을 사귀었지만 고인숙을 유난히 잊지 못했다. 그녀는 명실공히 김수영의 첫사랑이었다.

김수영의 생애에 등장한 또 다른 여인은 6·25 전쟁 당시 경남 거제포로수용소에서 만난 간호사 김은실이다. 한때 김수영의 영혼을 사로잡은 김은실은 훗날 김수영과 ‘신시론’ 동인을 함께 했던 양병식과 결혼했다.

그리고 포로수용소에서 만난 다른 간호사에 대한 기억은 잡지 ‘청춘’을 펴낸 청춘사와도 관련돼 있어 흥미롭다. “청춘사에서 울다시피 하여 겨우 7백 환을 받아가지고 나와서 로 선생을 찾아갔다. 장사에 분주한 그 여자를 볼 때마다 나는 설워진다. 도대체 미도파백화점에 들어서자 그 휘황한 불빛부터가 나는 비위에 맞지 않는다. 침이라도 뱉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고 나와서, 로 선생의 말대로 ‘상원’에 가서 기다렸으나 그는 오지 않았다.”(‘일기초(日記抄)’ 1954년 11월 24일)

김수영은 그녀를 기다렸던 시간을 “애인을 만나고자 기다리는 순수한 시간을 맛보았다는 것만으로 나는 만족할 수 있다”고 적고 있다. 이 ‘로 선생’은 김수영이 다른 글에서 “나의 애인”(‘일기초’ 1955년 1월 11일)이라고 말한 바로 그 여인이다. 그녀의 이름은 노봉식(나중에 김수영은 여동생 수명에게 노봉실이 본명이라고 귀띔한다)으로 김수영이 포로수용소에서 만난 간호사였다. 그녀가 간호사를 그만두고 서울 미도파백화점에서 상점 일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미 본처인 김현경과 서울 충정로에서 살림을 새로 시작한 터이지만, 김수영은 그녀에 대한 각별한 애착을 그렇게 적었다.

김수영의 여인들은 그의 문학에도 들어와 있는데, 가령 ‘반시론(反詩論)’이라는 글에서 김수영은 자신의 작품 ‘미인(美人)’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여편네의 친구들 중에는 상류 사회의 레이디나 마담들이 많다. 그 중에서도 졸작 ‘美人’의 주인공은 그 중 세련된 교양 있는 미인이라고 해서 같이 회식을 하러 갔다. 과연 미인이다. 나는 미인을 경멸하는 좋지 못한 습성이 뿌리 깊이 박혀 있는데, 이 Y여사는 여간 인상이 좋지 않다. 여유 위에 여유를 넓히려고 활짝 열어놓은 마음의 창문에 때 아닌 훈기가 불어 들어온 셈이다.”(1968년 ‘반시론’)

이렇듯 김수영의 여인들은 그의 산문과 시편 곳곳에 훈기처럼 편재해 있다. 예의 장선방도 그 여인들의 목록에 끼게 된 것이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김수영의 단 하나의 여인은 아내 김현경일 것이다. 말해 무엇하겠는가.

김수영은 언젠가 “시(詩)를 쓰는 나의 친구들 중에는 나의 시에 ‘여편네’만이 많이 나오고 진짜 여자가 나오지 않는다고 불평을 하는 친구”(1968년 산문 ‘미인’)도 있었다고 고백한 바 있다. 바로 “나는 닭띠이고 나의 아내가 바로 토끼띠”(1965년 산문 ‘토끼’)인 김수영과 김현경 사이의 사랑과 이별, 재회와 배신감, 다시 사랑으로 이어지는 굴곡의 여정이 김수영만의 사랑의 역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순서대로 하면 고인숙, 장선방, 김은실, 노봉식, B양, Y여사이겠으나 그 여인들은 김현경에 비하면 김수영에게 잠깐의 존재였던 것이다.

김수영은 누구

1921년 서울 출생. 1938년 선린상고 전수과 졸업. 1941년 일본 도쿄 성북고등예비학교를 거쳐 미즈시나 하루키 연극연구소에 다님. 1943년 학병 징집을 피해 중국 지린(길림)으로 이주. 1947년 ‘예술부락’에 ‘묘정(廟庭)의 노래’를 발표하면서 등단. 6·25전쟁 때 인민군에 징집됐다가 거제포로수용소에서 석방. 1959년 첫 시집 ‘달나라의 장난’을 출간한 이후 번역과 작품 활동을 계속하다가 1968년 6월 15일 밤 귀갓길에 버스에 치어 사망.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

◇자문교수(가나다순)=유성호(한양대) 이상숙(가천대) 최동호(고려대·한국비평문학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