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임항] 과학적 포경의 함정
입력 2012-07-11 19:02
고래는 오래전부터 신화와 노래와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단골손님이었다. 인간의 예술작품에 아마도 가장 많이 언급된 동물이 아닐까. 그렇지만 가장 오래도록 인류의 사냥 표적이 된 동물도 고래다. 사람은 신비스럽고 멋진 거대 포유류인 고래를 경배하면서도 무자비하게 약탈해 왔다.
영국의 환경문제전문가 클라이브 폰팅은 ‘녹색세계사’에서 ‘고래를 향한 인류 최대의 공격’이 어떻게 이뤄졌는지를 상술했다. 특히 18세기 이후에는 각국 포경선단이 고래의 출산해역에서 집중적, 경쟁적 사냥을 벌여 고래를 싹쓸이하고 다른 해역으로 이동하는 ‘메뚜기떼식’ 남획을 일삼았다. 이런 무절제한 경쟁은 국제포경위원회(IWC)가 결성된 1946년 이후에도 계속됐다. 폰팅에 따르면 20세기 들어 70년 동안 살육된 고래 가운데 절반 이상이 IWC가 결성된 후 잡힌 것이다.
IWC는 포경산업이 거의 와해되고 나서인 1982년 12종의 고래에 대한 상업적 포경을 1986년부터 중단하는 데 합의했다. 그러나 ‘과학적 연구를 위한 포경’은 허용됐다. 일본은 이 조항을 빌미로 주로 남극해에서 매년 1000마리가량의 밍크고래와 보리고래 등을 포획하고 있다. 노르웨이와 아이슬란드는 포경금지 자체에 반대하고 있다.
이 와중에 한국 정부가 지난 4일 파나마시티에서 열린 국제포경위원회에서 ‘과학적 포경’을 추진하겠다고 선언했다. 유럽 미국 호주 등은 한국이 일본의 선례를 따라 ‘사실상의 포경 재개’ 방침을 굳힌 것으로 보고 비난의 수위를 높였다. 농림수산식품부의 입장은 포경금지 후 고래 개체수가 많이 늘어 어업 피해가 발생하고 있으므로 피해상황을 파악하기 위한 포경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고래를 잡아 ‘배를 갈라봐야만’ 먹이사슬 관계 등을 알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포경 반대국가와 환경운동진영은 고래를 죽이지 않고도 배설물 수거 등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고 반박한다.
고래가 늘어 다른 어족자원을 고갈시킨다는 주장은 피라미드형 먹이사슬이 갖는 안정성을 감안하면 기우에 불과하다. 오직 사람의 남획이나 서식지 파괴, 외래종 침입, 그리고 대규모 자연재앙만이 그 안정성을 무너뜨린다. 인간이 생태계에서 취약한 상위 포식자를 솎아내야 할 필요는 없다. 또한 고래는 오래 살기는 하지만 출산율이 한 해에 1∼2%로 낮아서 그 수를 회복하기가 쉽지 않다.
한국과 일본 등에서 고래 고기를 먹는 전통이 언제나 비난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사는 시간과 공간에 따라 단백질 공급원이 부족할 경우 고래 고기 또한 대안이 될 수 있다. 음식문화는 옳고 그름이나 우열을 따질 게 아니다. 그러나 많은 종류의 고래들이 여전히 멸종위기에 처해 있는 때에 우리나라가 먼저 고래 포획에 나서서 얻을 수 있는 이득이 얼마나 되겠는가. 더구나 지금 우리나라에서 단백질 공급원은 넘쳐난다.
국내외에서 비판이 거세지자 농식품부는 한 발짝 물러섰다. 강준석 원양협력관은 11일 “IWC에 대한 포경 계획서 제출 여부를 국제여론과 환경단체 등의 의견을 수렴해 최종 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국제사회에서 한국은 ‘불법 포경국가’라는 불명예스러운 이미지가 이번에 다시 고착되고 말았다. IWC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89개 회원국이 보고한 규정위반 포획사건 23건 중 21건이 울산 앞바다 등 우리나라 연안에서 발생했다.
과학포경 추진 방침의 대외발표 절차도 짚고 넘어가야 한다. 농식품부 관계자는 “당시에는 (과학조사 계획이 없어서) 다른 부처와 협의할 필요가 없었다”고 말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 9일 수석비서관회의에서 부처 간 협의 부재의 문제점을 지적한 것으로 알려졌다. 환경부 관계자는 “녹색성장 선도국의 이미지와 오는 9월 제주도 세계자연보전총회(WCC)에 찬물을 끼얹을까 두렵다”고 밀했다.
임항 환경전문기자 hngl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