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지형은] 나한테 주어진 길
입력 2012-07-10 18:45
우리나라 사람 모두 아는 노래가 있다. 1932년에 세상에 나왔다. “가을이라 가을바람 솔솔 불어오니, 푸른 잎은 붉은 치마 갈아입고서 … 봄이 오면 다시 오라 부탁하누나.” 백남석이 노랫말을 쓰고 현제명이 곡을 붙인 노래 ‘가을’이다. 국정교과서에도 실려 아이 때부터 모두 안다. 보통은 1절만 실려 있기도 하고 2절까지 실리는 경우도 있는데 2절 가사의 후반이 이렇다.
“추운 겨울 지날 적에 우리 먹이려고, 대자연이 내려주신 생명의 양식.” 그러나 백남석이 지은 노랫말은 다르다.
“추운 겨울 지날 적에 우리 먹이려고, 하나님이 내려주신 생명의 양식.”
집중력 외에 포용력 필요하다
교과서에 실리는데 특정 종교의 신앙을 뜻하는 ‘하나님’이란 단어가 부담되어 ‘대자연’으로 고친 것이다. 맹인 점쟁이 백사겸이 예수를 믿고 전도자가 되는데, 이 사람은 성경 전체를 다 외웠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성경을 읽어주었는데, 그 아들이 백남석이다. 나는 백남석의 ‘가을’을 생각할 때마다 눈물이 나도록 고맙다. 기독교의 신앙 정서가 이렇게 아름다운 언어로 태어났고, 이걸 종교, 지역, 계층, 학력에 상관없이 이 나라 모든 사람이 다 부르니 말이다.
한국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 집중력이 강하다. ‘예수 천당, 예수 그리스도의 피 묻은 십자가의 복음, 이 도시를 주님께 ….’ 귀한 헌신이며 고마운 감격이다. 그러나 어느 문화권에서든 기독교 인구가 일정 이상이 되면 교회는 사회 전체를 이끌고 갈 책임을 진다. 여기에 실패하면 기독교가 그 사회와 문화와 삶에 깊이 뿌리내리지 못한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집중력 외에 포용력이다. 기독교의 원색적인 피 묻은 십자가의 복음을 일반 사람도 쉽게 알 수 있는 따뜻하고 아름다운 언어로 풀어내야 한다. 기독교적인 용어가 하나도 들어가지 않아도 괜찮다. 신학적으로는, 십자가의 복음에 대한 집중력이 특별계시이고 모든 사람을 끌어안는 포용력이 일반계시의 은혜다. 백남석의 ‘가을’이 그런 것이고 윤동주의 ‘서시’가 또 그렇다.
교회는 교회의 길을 가야
한국 교회는 일반계시에 대한 이해가 약하다. 기독교가 오늘날 우리 사회와 동아시아 그리고 더 나아가 21세기의 지구촌에서 건강한 리더십을 가지려면 다음의 세 가지에 대해 확신을 갖고 공부해야 한다. 인도적 인륜도덕, 법치적 민주주의, 상생의 시장경제. 이 셋은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뜻을 일반적인 용어로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이 사람을 당신의 형상을 따라 창조하셨는데 그 내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양심이다. 사람이 양심에 따라 사람답게 사는 데서 형성되는 가치가 인도적 인륜도덕이다. 힘 있는 자들이 제멋대로 하지 않고 공공의 선을 위한 법칙을 정해놓고 거기에 따라 모든 사람이 존경받는 사회구조가 법치적 민주주의다. 먹고사는 문제처럼 사람에게 중요한 게 어디 있겠는가. 사람 사는 데서 시장처럼 자연스러운 게 또 무엇인가. 그런데 더불어 먹고살아야 한다. 내가 잘사는 게 다른 사람도 잘살게 만드는 것이어야 한다. 그게 상생의 시장경제다. 하나님은 이 세 가지를 사랑하신다. 이와 연결되는 내용이 성경에 많다. 십자가 사건을 중심하여 그에 따라 흐르는 성경의 중심 흐름이기도 하다. 교회는 교회 공동체의 삶에서도 이것을 공부하고 훈련해야 한다.
한국 교회가 한 10년은 잠잠히 자신을 성찰하며 공부하고 기도하자. 올해 말이 대선인데 기독교인을 대통령으로 뽑아야 한다든지 하는 엉뚱한 일을 하지 말자. 정치꾼들에게 이용당하지 말자. 그런 실수는 두 번 정도면 충분하지 않은가. 교회는 교회의 길을 가야 한다. 윤동주 ‘서시’의 한 구절이다.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지형은 (성락성결교회 담임목사)